내가 만일 첫사랑에 실패하지 않았다면여러분들 모두 가슴 떨리는
첫사랑의 추억 하나쯤은 가지고 계시죠?
첫사랑의 기억은 모든 사람을 낭만주의자로 만드는 것 같아요.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르면 시도 한편 지을 수 있고 아무리 음치인 사람도 유행가를 흥얼거리게 되니까요. 1급의 지체 장애인이이면서 두 딸아이의 엄마인 제게도
첫사랑의 추억이 있답니다. 그때는 그 추억이 이토록 아름다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첫사랑의 실패에 이렇게 감사하게 될 줄도 몰랐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필요 없는 시행착오는 없는 것 같아요 실패가 있어야 반드시 성공하게 되니까요.
저는
첫사랑의 실패가 있었기 때문에
결혼 할 수 있었고, 지금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됐답니다. 지금부터 저와 함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 속으로 한번 빠져 보시겠습니까?
난 여자가 되고 싶지 않았답니다저는 평생 여자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제 몸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살았죠. 제가 10대였던 그때는 장애인이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시절이었어요. 어쩌다 언니 등에 업혀서 밖에 나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제 등 뒤로 비수처럼 날아드는 말은 ‘병신’이란 말 이였답니다. 그런 세월을 살아가야 했기에 여자이기는커녕 사람대접만 받고 살아도 다행이다 싶었죠. 얇은 다리를 감추기 위해 한여름에도 내의를 입고 긴 치마를 입으며 어떻게든 두 다리를 가리려고 했었고, 어쩌다가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이 있어도 으레 동정이려니 하며 무시해 버렸답니다. 그런 제게도 소설 같은
첫사랑이 찾아왔답니다.
친구 언니가 하는 일일찻집에 참석했던 날, 통기타를 치며 해바라기에 ‘내 마음에 보석상자’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친근한 얼굴을 한 그 남자의 노래에 나는 완전 매료되었고 집에 돌아와서도 그 남자의 노래가 귓가에서 스치는 듯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저
배은주씨 계신가요?”
“제가 배은준데…….누구시죠?”
“저. 며칠 전 찻집에서 노래를 했던 사람인데요,
배은주씨를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파란 옷을 입고 해바라기 노래를 멋지게 불려대던 그 남자가 내게 전화를 걸어 온 것입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그 남자를 만나러 나갔고 나를 보자마자 그 남자는 대뜸 사귀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 남자의 눈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남자의 시선을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휠체어를 살피고 있었어요. 그 후 그 남자는 내가 공부하고 있는 독서실로 책을 사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집 앞으로 찾아오기도 했지만 휠체어를 밀어주는 그 남자의 손은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결국 나는 이사를 하면서 연락을 끊어버렸고, 그 이후로 그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랑에 빠지니까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더군요그 이후 대학에 도전했지만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입학을 거절당한 후, 목발이라도 짚고서 다시 도전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여수애양재활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그때가 내 나이 24살이었죠. 여덟 군데를 수술하고 지독한 통증과의 전쟁을 시작한 나는, 강하다고 믿었던 나의 정신력이 육체적 고통 앞에서 산산이 추락하고 있는 것을 그저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했습니다. 정신력이 아무리 강한 사람도 지독한 육체적 고통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알게 됐습니다. 침대에 누워 하루하루 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한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단호하게 때론 느끼하게 말입니다.
누워서 지내는 내게 그 남자의 목소리는 유일한 소일거리가 됐습니다. 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그 남자도 알았을까요? 무릎이 아파 입원을 했던 그 남자는 물리치료 받는 기간이 거의 끝나 가는데도 퇴원할 생각을 않고 매일같이 내게 찾아와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 마침 집안에 갑작스런 일이 생겨서 간호를 해주던 어머니께서 급히 서울로 가시게 됐고, 나 혼자 병실에 남아 간호해줄 사람을 알아보고 있는데, 선뜻 그 남자가 나를 간호 주겠다고 나셨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그 남자가 매일같이 제 머리를 빗겨주고 감겨주고 밥을 먹여 주면서 극진히 보살펴 주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성어린 간호 때문일까요? 예정보다 빨리 깁스를 풀고 물리치료를 시작할 즈음 그 남자는
첫사랑의 그 남자와 똑같은 말을 하더군요.
“우리 사귈래?”
순간 저는 그 남자의 눈을 봤습니다. 그 남자의 눈은 제 휠체어가 아닌 제 눈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 대답은 오케이였지요. 그 남자의 목소리를 매일같이 들을 수만 있다면 저는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장애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용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시련은 다가오더군요. 그는 장남 이였고 저의 장애가 너무 심한 것이 우리에게는 시련 이였습니다. 그에 집안과 저의 집을 비롯해서 주위에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기 시작했어요.
“너희들은 절대 안 돼. 너만 상처받을 거야. 남자야 무슨 손해니?
연애하다 헤어지면 그뿐이지 그렇지만 너는 여자고 또 장애도 심하고.”
나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정말 상처받게 되면 어쩌나 끝끝내 그의 집안에서 승낙이 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저는 점점 지쳐 갔습니다. 그런 제게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그 남자에 한마디가 다시 용기를 내게 했습니다.
“나는 길거리에서 자전거 바퀴만 봐도 좋아 내 맘 알겠니?”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고 하죠. 온몸에 엔도르핀이 돌기 때문에 거의 기분은 일종에 환각상태에 빠지게 되고 판단력은 극도로 흐려지게 됩니다. 진전한 사랑만 있다면 우리가 가진 장애는 오히려 사랑을 더 돈독하게 해주는 끈이 될 수 있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과 용기겠죠. 그때부터는 저는 눈에 뵈는 것이 없어지더군요. 모든 일에 용기를 생겼습니다. 그 남자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게 됐고, 그 남자 역시 제가 원하는 것은 다 해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