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장사 갔다 오시면서 라면땅 같은 과자를 한보따리씩 사 오셨는데 아침에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서면 아이들에게 라면땅 한 봉지씩을 쥐어주면서 “우리 영선이 하고 학교에 잘 갔다 온나”하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일종의 뇌물이었다.
그러나 동네 아이들은 가방도 들어주고 절뚝이며 걷는 그의 걸음에 보조를 맞춰주다가도 돌방상황이 생기면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나 버렸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거나, 근처에 나환자촌이 있어 가끔 길에서 나환자를 만났던 것이다.
“문둥이가 아이들을 잡아가서 간을 빼 먹는다고 했는데, 길에서 문둥이를 만나면 다들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 뛰어가 버리고 뛸 수 없는 아이는 엉엉 울고 엉금엉금 기면서 목이 터져라 엄마를 불렀다.
“산길을 혼자 가려면 묏등에서 귀신이 나올까 봐 무서웠고, 여름철에는 뱀을 만나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없는 살림이었지만 아이들 기죽이지 않으려고 원하는 것은 다 들어 주었다. 마루치아루치 운동화가 처음 나왔을 때도 어머니는 그 운동화를 사 주셨는데 너무 아까워서 초가집 시렁위에 얹어두고 학교 갈 때만 신었다.
예전에는 학비를 제 때 못 낸 아이들은 학비를 가져오라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월사금을 못 내서 쫓겨 올까봐 어머니는 바닷가에서 굴도 캐고 파래도 뜯고 남의 집 허드렛일도 하면서 한 번도 월사금을 미루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가난한 살림이라 반찬은 어머니가 팔다 남은 무 배추 등이 고작이었다. 어머니가 계란 장사를 하실 때 한번은 계란을 한 다라 이고 나가다가 전깃줄에 걸려서 넘어졌다. 어머니는 울면서 깨어진 계란을 주워 담는데 덕분에 계란을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을 혼자 걸어 갈 때면 ‘절뚝발이 간다’며 아이들이 놀렸다. 그럴 때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아이들이 다 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외톨이가 되어갔다.
서여중에 입학을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오른쪽 다리에 보조기를 착용했다. 보조기를 착용해도 오른쪽 다리에 힘이 없으니 몸이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어 항상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걸었다.
하루는 같이 다니던 친구가 자기엄마에게 야단을 맞으면서 그 잘못을 그에게 뒤집어 씌웠다. 그 엄마는 담임선생에게 항의를 했고 선생은 그를 불러 야단을 쳤다. 몸 불편하다고 봐 주었더니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치느냐며…. 담임선생 앞에서 제대로 변병도 못 한 채 눈물만 뚝뚝 흘렸다. 선생이 정말 미웠고 공부도 학교도 다 싫었다.
어머니는 밥 먹여주고 학교 보내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어머니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진학은 했는데 가장 적게 걷는 학교를 택하다보니 영도여상이었다. 학교 다니기가 싫어서 날마다 조퇴를 했는데 보조기 고치러 갑니다하면 그만이었다. 사실 자주 넘어져서 보조기가 고장이 나기도 했지만 넘어지면 다치고, 바지가 찢어지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
어쩌다 친구들이랑 남포동에라도 나가면 떡볶이 사주고, 영화 보여 주고 잘 어울려 놀고 와서는 영선이 하고 다니니까 쪽 팔린다는 소리가 들릴 때면 정말 죽고 싶었다. 고3이 되자 담임선생은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동래여전 마케팅과를 졸업하면 취직은 책임지겠다며 진학을 권유했으나 더 이상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방안에만 처박아 두지 않았다. 남동생이 결혼 할 여자를 데려 왔던 것이다. 어머니는 누나를 먼저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의 짝은 찾지 못해 할 수없이 동생이 먼저 결혼을 했다. 그는 집안에 틀어박혀 엄마에게 투정이나 부렸다.
“언니가 어머니한테 투정을 부리면 저도 언니가 하는 대로 할 겁니다” 맹랑한 올케였다.
“어머니가 평생 돌봐 줄 것도 아니고 어머니 돌아가시면 저는 언니 책임 안집니다”
올케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 부끄럽기도 해서 그럼 어떻게 하란 말이냐고 했더니 무엇이라도 배워보라고 했다.
이영선씨 이야기는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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