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혜씨. ⓒ이복남

5학년이 되자 여학생 하나가 들어와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남자애들의 놀이는 여전했다. 여학생 둘이 맨 앞줄에 앉았는데 쉬는 시간이면 남학생들은 뒤에서 배구공을 던지며 그를 맞추면 3점이고 다른 여학생을 맞추면 2점으로 정해 놓고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수건으로 때렸다. 마른 수건으로 때리면 재미가 없다고 수건을 물에 적셔서 책상 위에 올라가서 때리곤 했는데 공포 그 자체였고 모두가 악마 같았다. 중학생이 되자 여학생 서너 명이 더 들어 왔고 남학생들의 괴롭힘은 점차 줄어들었다.

“지금은 그 친구들하고 잘 지내고 있지만 제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들입니다.”

다른 친구들은 장래 무엇이 되겠다고 나름대로의 꿈을 펼쳤으나 그의 소망은 보통사람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평범하지 않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중학교 때 교복자율에서 다시 교복을 입기 시작했는데 우리학교(맹학교)만 교복을 안 입었습니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얼마나 부럽든지…….”

대신동에는 학교가 많았다. 교복이 얼마나 부럽든지 그 문화만이라도 접해보고 싶어서 학교를 마치고 나면 주로 대신동에서 놀았다. 어쩌다 옆자리에 교복 입은 여학생이 있으면 몰래 교복을 만져보기도 했는데 그 촉감은 가슴을 떨리게 했다.

맹학교에서는 정규과목 외에 맹인 안마사를 위한 이료(理療)과목을 배운다. 그도 맹학교 학생이므로 이료과목을 배우기는 했지만 별 흥미가 없었다. 권률 선생은 그에게 진학을 해 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선생님의 배려는 고마웠지만 언감생심, 당시만 해도 맹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럼에도 선생은 대학진학을 종용했고 몇몇 친구들과 진학 공부를 했다.

대학을 간다고 생각하자 무슨 과를 갈 것인가가 고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신방과에 가서 방송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갈 만한 신방과는 없었다. 그래서 국문과를 가고 싶다 했더니 선생은 안 된다고 했다. 시각장애인은 한문을 배우기 어렵다며 차라리 영문과를 가라고 했다.

회사 동료들과, 뒷줄 왼쪽에서 두 번째 한지혜씨. ⓒ이복남

수능을 치고 성적에 맞춰 학교를 정하는데 그에게는 부산여자대학교(현 신라대학교)로 낙착되었다. 맹학교 졸업생 중에 7~8년 동안 대학생이 한명도 없었는데 그해 다섯 명이 진학을 하게 되었고 예종덕 교장 선생님은 기분이 좋아 싱글벙글 이었다.

그동안 그가 만난 비장애인들은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다. 모두가 그를 도와주고 배려해 주는 봉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 그토록 원하던 비장애인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으니 그들이 다가와 줄줄 알았기에 대학생활에 가슴이 설레었다.

그런데 그 설렘은 O.T에서부터 여지없이 깨어졌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다. 부곡하와이에서 O.T.를 했는데 모두가 춤추고 노래 부르며 신이 나서 흥겨워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습니다.” 비장애인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너무나 고통스럽고 두려움에 떨며 혼자 울고 있었던 것이다.

댄스 시간에 파트너가 정해졌는데 혼자 울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서는 자기는 지체장애인이라 춤을 출 수가 없다고 했는데 4년 동안 친구가 된 은영이었다. 댄스시간 그와 그의 파트너A, 은영이와 그의 파트너B 네 사람은 춤을 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대학생활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는 갔지만 공포의 월요일이었고 방학이 끝나고 학기가 새로 시작될 때면 두렵고 불안했다.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시험 칠 때는 확대 복사를 해야 하고…….” 언제나 낯선 사람들 앞에는 자신이 시각장애임임을 드러내야 했던 것이다. 어느 교수가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에 대해서 팀별 과제를 주었는데 그와 은영이 그리고 A와B가 한 팀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노트 대신 머릿속에다 요약정리를 잘 하는데 과제는 문장으로 정리를 해야 했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정리를 해 갔는데 그의 리포트를 본 B는 너무나 퉁명스러웠다.

“이게 뭐냐, 너 때문에 나도 점수를 잘못 받을 수 있으니까 다시 해 와라.” 도서관에서 자료 찾기도 어렵고, 밤을 새워 해 갔지만 B는 안된다고 했다. 말없이 다시 정리 해 갔으나 번번이 다시 해오라고 했고 결국은 네 번이나 퇴짜를 놓았다.

“나는 잘 안보여서 정리 하는 게 너무 어렵다” 울음을 삼키며 애원했는데 “너는 걸핏하면 그 이야기 하느냐” B의 일침은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찔렀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얼마나 울었든지. 비장애인 세계에서 함께 살기가 이렇게 어렵단 말인가. 집에 돌아와 동생의 도움으로 겨우 리포트를 작성했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B에게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맙소사, B는 기억도 없다고 했다.

[리플합시다]복지부 활동보조서비스, 무엇이 가장 불만입니까?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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