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 꿈을 꾼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나름대로의 꿈을 그리며 인생을 설계한다. 꿈은 우리의 미래이자 희망이기도 하다. 꿈을 위해 한걸음 한걸음 힘들게 내딛는 발걸음은 때론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꿈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은 아름답고 숭고하기도 하다.

한지혜씨. ⓒ이복남

그대는 어떤 꿈을 꾸는가. ‘Boys Be ambitious!’ 요즘 아이들은 어떤 꿈을 꾸는 지 잘 모르겠지만 필자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영어 선생님이 첫시간에 해 주신 말씀이다. ‘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야망이라고 하면 뭔가 크고 원대한 것을 생각나게 하지만 ‘보통사람으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지극히 소박하고 평범한 꿈이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가시밭길을 묵묵히 걷는 한 사람이 있다.

한지혜(31)씨. 아버지 한중원(57)씨와 어머니 염말례(54)씨의 첫딸이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서 살림 밑천이라는 첫딸을 얻었으니 금지옥엽으로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 하였다. 부모님은 살기가 힘들 때였지만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방울로 방실방실 웃는 딸아이의 얼굴은 만 가지 시름을 녹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무렵 부산 괴정동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광복동에 있는 조그만 기계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를 키우며 살림을 했는데 8개월쯤의 어느 날 아이가 열이 나면서 보채기 시작했다. 병원을 찾으니 홍역이라고 했다. 홍역 예방 주사도 맞혔는데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며칠을 앓고 나더니 눈에 백태가 끼기 시작했다. 백내장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홍역 때 보다 더 놀란 가슴을 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한지혜씨. ⓒ이복남

아이가 너무 어려서인지 아니면 상태가 위중해서 인지 대부분의 병원에서 고개를 저었고

수소문 끝에 안과를 제일 잘 한다는 서울대학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수술은 잘 되었으니 사흘에 한 번씩 치료 받으러 오십시오.”

부산에서 서울까지. 사흘에 한번은커녕 일주일에 한 번도 제대로 병원을 가지 못했다. 병원비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6남매의 셋째로 제법 괜찮은 집안이었으나 할아버지가 사업이 망해서 돌아가시면서 아버지가 아랫동생들까지 돌보아야 했기에 끼니 때우기도 힘든 형편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병원을 자주 못 간 것을 두고두고 후회를 하셨지만 아마도 수술이 실패였던 것 같습니다. 나중에 맹학교에 가보니 그 선생한테 수술 받은 친구들이 많더라구요”

두 번의 수술에도 불구하고 눈은 낫지를 않았다. 그는 눈이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채 알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고 나이를 먹었다. 부모님은 딸 하나 거두기에도 벅찬 형편이라 둘째를 가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두 살 아래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동생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렸을 때는 동생이 유일한 친구이자 안내자였습니다”

6살 때 다시 한 번 수술을 했는데 오른쪽은 도저히 가망이 없고 왼쪽 눈을 수술 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든가 그런 것은 기억조차 없었다.

“주사에 대한 공포가 너무 심해서 주사기만 보면 울었던 것 같습니다”

수술을 하고난 뒤 안경을 맞추었고 근처에 있는 일반 유치원을 다녔다. 유치원에서는 짝지를 정해 주었는데 모두가 노란색 유치원복을 입었기에 짝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유치원에 갔다 오면 어머니는 이것저것 물으시면서 딸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초등학교 소풍, 왼쪽 두 번째 한지혜씨. ⓒ이복남

보통의 부모들 같으면 일반학교에 보냈을 만도 한데 그의 부모님은 그가 시각장애인임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에 적령기가 되자 맹학교 근처인 송도로 이사를 했고 그는 부산맹학교에 입학을 했다.

맹학교 1학년은 일곱 명이었는데 여자는 그 혼자였다. 그는 여섯 개구쟁이의 완전한 놀이감이었다. 남자애들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때리며 놀렸고 그가 울면 더 재미있어 했다. 어머니는 돈이 없어서 딸의 눈을 멀게 했다는 생각에 돈에 벌고 싶어 했는데 그가 학교에 들어 간 후 미용학원을 다녔고 그리고 미장원을 차렸다.

미장원을 하시는 어머니는 밤늦게야 돌아왔고 집에 오면 동생 친구들과 놀았는데 일반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남학생들의 괴롭힘에 견디다 못해 2학년 때 맹학교 다니기 싫다고 울고불고 떼를 써보기도 했지만 일반학교에서는 받아주지 않았답니다”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