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애인물 톺아보기>

우리 사회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장애 인물과 그의 열정적인 인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장애인물 톺아보기>.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질문1 : 오늘 소개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답변 : 오늘은 특별히 미국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60여년을 사신 분인데요. 오늘의 주인공은 홀트아동복지회 말리 홀트 이사장인데요.

1956년 한국에 들어와 아버지 해리 홀트와 어머니 버사 홀트가 세운 홀트아동복지회에 합류한 이후 60년이 넘도록 장애인과 부모 없는 고아, 미혼 부모들을 돌봐 오신 분입니다.

올해 85세이셨는데요. 팔순 고령에도 경기도 고양시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300여명의 중증 장애인들과 함께 활동해 오신 분, 한국에서 사신 동안 내내 자기 방도 없이 장애인 4명과 함께 기거해온 분입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깝게도 지난 5월 17일 별세하셨습니다.

말리 홀트 여사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쳐 간 수 많은 분들이 홀트 여사를 애도했고, 우리나라 사회복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분들이 다 함께 머리 숙여 애도를 표했습니다.

질문2 : 최근에 안따까운 소식이 있었군요. 말리 홀트 여사께서 미국인이라고 하셨는데 그럼, 어떻게 우리나라에서 홀트아동복지회를 운영하게 되었는지요?

답변 : 홀트아동복지회는 말리 홀트여사 부모님의 의해 설립된 단체였는데요.

경기도 일산 탄현동에 있는 현재의 사회복지법인 홀트아동복지회는 1955년 아버지 해드 홀트씨와 어머니 버서 홀트씨, 그러니까 오늘의 주인공 말리 홀트씨의 부모님에 의해 전쟁 직후 혼혈 고아 8명을 입양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첫 고아들을 위한 사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고 합니다.

말리 홀트 여사도 부모님과 함께 한국에 들어왔는데요. 부모님이 한국에 들어온 시기가 앞서 1956년도라 말씀드렸는데요.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아닙니까?

이때 21살의 젊은 나이로 한국에 와서 부모님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쟁고아, 그리고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해 왔던 것입니다.

홀트 여사는 간호사 출신이어서 부모님을 적극적으로 도왔고요. 평생을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장애인들과 함께 기거하면서 헌신해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0년도에 어머니 버서 홀트씨가 돌아가시면서 말리 홀트씨가 이사장을 맡아 홀트아동복지회를 운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질문3 : 그렇다면 부모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부모님은 어떻게 한국을 찾았는지가 궁금한데요?

답변 : 말리 홀트 여사의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1남 5녀였는데 말리 홀트는 셋째였습니다. 홀트씨 집은 미국 오리건주에서 제재소를 운영해 큰 돈을 벌어 미국에서도 꽤 잘 사는 집안이었는데요. 1955년 한국 혼혈 아동 8명을 입양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헤리 홀트씨는요. 어느 날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경험을 했다고 하는데, 이 일로 인해서 누군가를 위해 봉사하는 생활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요.

우연히 마을회관에서 한국 전쟁 기록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이 영화의 대부분이 전쟁이 끝나고 난 폐허의 모습과 전쟁고아들의 가슴 아픈 모습들이었다고 합니다.

그 영화를 보고서는 어린 고아들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주고 싶었고, 그래서 한국의 부모 잃은 아이들을 보고 후원금을 보내다가 결국 8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입양을 한 것입니다.

질문4 : 한꺼번에 8명의 아동을 입양 한 거에요?

답변 : 한꺼번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1950년대 당시 미 연방법은 2명 이상의 해외 아동 입양은 허용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해리-버사 부부는 지인들을 찾아 자문을 구하고 의회 앞에서 시위도 하고요. 시위하다 보다 강력한 ‘투쟁’을 끈질기게 하게 되자 1955년 미연방 하원은 ‘특정 전쟁고아 구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입양 고아의 숫자 제한을 완화했는데요. 이른바 ‘홀트 법안’이었던 것입니다.

법안 통과 직후 말리 홀트 부모님이 한국에서 갓난아이에서 세 살 반까지 아동 8명을 데리고 포틀랜드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은요, 당시 국제 입양에 부정적 생각을 갖고 있던 미 국민들에게 가족의 사랑이 인종과 국가의 벽을 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해외 입양을 원하는 가정이 늘었고, 그해 부모님은 홀트아동복지회 전신인 ‘홀트양자회’ 설립해서 입양 사업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질문5 : 부모님은 끝까지 한국에서 고아를 돌봤나요?

답변 : 아버지는 한국에 들어 온지 10년을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고아들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는데 안따깝게도 1964년에 한국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아버지 죽음으로 어머니는 충격이 컸고, 낯선 이국 땅에 셋째 딸인 말리 홀트 외엔 가족 아무도 없었지만, 당시 너무나도 어렵게 살아가는 부모 없는 아이들을 외면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 버사 홀트 여사는 모든 입양아들의 할머니로 남아 아이들을 위한 위탁가정을 찾기도 하고, 장애인을 위한 복지시설과 특수학교를 운영했고요. 장학사업과 상담, 그리고 미혼모 발생 예방을 위한 교육사업을 해 왔습니다.

이처럼 어머니 버사 홀트 여사는 지난 2000년도에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평생을 입양아들의 영원한 할머니로 살아오셨습니다.

질문6 : 한국에 가족이 없는데 부모님 두 분다 한국 땅에 묻혀 계신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답변 :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니까 당연히 미국에 친척들이나 가족들은 아버지 묘소를 미국에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요.

어머니가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게 아버지의 유언이었다고 전하면서 친척들을 설득했고요. 어머니도 평소 가족들에게 아버지 곁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부모님 두 분 다 한국 땅에 묘소가 있다고 합니다.

딸인 말리 홀트 여사도 1956년 21살에 한국에 와 살았으니 당연히 부모님 곁에 묻히고 싶다 하셔서 이번에 부모님 옆에 안장되었습니다. 정말 대한민국의 아이들을 사랑했던 어머니도 아버지도 말리 홀트여사가 현재 홀트아동복지회가 있는 일산, 한국 땅에 묻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질문7 : 말리 홀트씨가 한국에 온 것은 부모님의 요청이 있었을까요?

답변 : 그렇습니다. 홀트 부부는 한국에 도착해서 고아들을 돌보는데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는데요. 마침 셋째 딸이었던 말리 홀트씨는 간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부모님이 한국에 올 때부터였습니다.

그러다 의료공부를 더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 4년간 공부를 더 하고 1965년 다시 한국으로 왔고요. 그리고 그 뒤로는 석사학위 취득을 위해 1991년 1년간 미국에서 머물렀던 것 외에는 줄곧 한국에서 봉사를 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부모님 곁에 묻히기 전까지 한국의 아동과 장애 어린이를 위해 부모님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왔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1956년에 한국에 들어와 공부하러 미국에 들어간 기간 5년을 제외한 60여년을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해외로 입양가는 아이들을 데리고 수백 번 비행기를 탔고요.

그동안 말리 홀트의 품을 거친 입양아는 10만명이 넘고요. 그래서 말리 홀트 여사를 천사라고 칭송도 있지만요. '고아 수출업자'라는 비난도 함께 들어야 했다고 한 언론을 통해서 밝히기도 했습니다.

질문8 : 해외 입양이라고 말했지만 고아수출이란 오명을 받아 온 것도 사실이잖아요?

답변 : 물론입니다. 그렇습니다만, 말리 홀트 여사 부모님이 한국 전쟁이 막 끝난 상황에서 굶주리고 있는 한국의 전쟁 고아들에게 굶주림에서 구하고 좌절감을 극복할 수 있도록 가족을 만들어 주자라는 선의, 착한 마음이 먼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부유하게 살았던 말리 홀트 부모님은 그 부유한 생활을 청산하고 낯선 땅에서 버려진 아이들에게 가족을 만들어 준 성인이라고 추켜 세워 주시는 분도 계시고요.

반면에 앵커께서 지적해 주신 것처럼 해외 입양을 ‘아기 파는 사업’, ‘고아 수출’이라며 죄인 취급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말리 홀트 여사가 1956년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는 버려지는 아이들이 너무 많았다고 했습니다.

말리 홀트여사가 부산에 있는 영아원에서 봉사할 때였는데요. 하루에 한 명씩 버려진 아이들이 들어오고 한 명씩 죽어 나갔답니다. 분유를 아끼려고 분유 한 컵에 물을 열 컵씩 부어서 먹일 때라 애들이 너무 말랐었고요.

그 당시에는 이러한 처절한 현실이 있었고 이 비참한 현실에서 아이들을 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 입양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상황은 국내 입양은 거의 불가능한 환경이었고 그래서 해외입양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고 말리 홀트 여사는 말합니다.

질문9 : 그러함에도 해외 입양에 대한 여론은 좋지 못한 거 였지요?

답변 : 그렇습니다. 당시 일부 미국인들도 입양아를 농장에서 일할 아이를 데려왔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을 만들어 퍼트리거나 동양인을 데려와 미국을 더럽힌다며 입양 기관을 비난하거나 협박하기도 했답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외국 아무 데나 보낸다더라, 미국 데려가서 일꾼으로 쓴다더라면서 비아냥 거림도 있었고요. 뿐만 아니라 입양될 아이를 찾으러 가면 ‘돈 내라’고 하는 한국의 당시 고아원도 있었다고 하고요.

이러한 소문이나 비난에 대해서 말리 홀트 여사의 목소리는 단호했습니다.

“그럼, 당신이 입양하시지요” 그랬더니 비난을 했던 사람이 ‘왜 내가 입양을 해야 하느냐'며 펄쩍 뛰더랍니다.

본인들은 입양에 대해서 전혀 생각도 해 보지도 않고, 입양 아이들을 위해서 1천원, 1만원 후원조차 해보지 않았던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맹비난에 화를 참기 어려울 때도 있었답니다.

그 만큼 입양에 대해 인식이 나빴고요. 하지만 너무 어려울 때라 해외 입양이 안 됐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었던 현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해외 입양이 좋다는 게 아니고요. 친부모와 살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자라면 좋겠지만요. 가족이 없는 것보다는 국적이 달라도 가족이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해외 입양 사업을 진행해 왔다고 했습니다.

해서 홀트아동복지회는 1957년부터 미국에 있는 입양 가족을 모아 '입양 가족 야유회'를 열기도 했고요.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곳과 뿌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입양인을 위해 1975년부터 모국 방문 행사를 꾸준히 진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질문10 : 비난, 비아냥, 그런데도, 우리에겐 여전히 장애아에 대한 입양은 어렵지요?

답변 : 그러니까요. 물론 우리 경제가 좋아지면서 버려지는 아이가 줄고, 입양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어 예전에 비하면 국내 입양이 늘어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은 여전히 국내 입양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또한 사실입니다.

장애아동의 국내 입양과 해외 입양하는 비율은 지난 최근 10년의 통계를 봐도 국내 입양은 50명이 넘지 않습니다만 해외 입양은 200명을 훨씬 넘기 때문에 4-5배가 넘게 해외 입양이 많다는 점입니다.

질문11 :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된 해외 유명인사도 많다고 들었는데요?

답변 : 많지요. 가령 영화 ’국가대표‘의 실제 주인공인 토비 도슨씨, 미국 스키 국가대표로서 월드컵, 세계선수권에서 여러 차례 우승했고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참가해서 동메달을 획득한 유명 선수였습니다.

현재는 대한민국의 스키 국가대표팀 코치로 일하고 있는데요. 이 분이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되었는데 유명세에 힘입어 지난 2007년도에 친아버지와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미 항공우주연구소 수석연구원이었고 현재는 한국입양홍보회 회장을 맡고 있는 스티븐 모리슨씨, 프랑스로 입양되었던 플뢰르 펠르랭씨는 프랑스에서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장관을 지내셨고요. 장 뱅상 플라세씨도 프랑스 상원의원과 국가개혁장관을 역임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영화 배우 대니얼 헤니, 역시 홀트 입양아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세계적인 비올리스트 용재 오닐씨를 키워낸 어머니 이복순 여사도 홀트 출신입니다.

정말, 이외에도 여러분이 많은데, 제가 충분히 조사를 하지 못해 유명인사를 많이 전해 드리지 못한 것이 좀 아쉽습니다.

질문12 : 홀트아동복지회 설립이 올해로 63년 정도 되는 것 같은데요. 지금은 어떤, 어떤 사업들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습니까?

답변 : 지금도 여전히 아동 입양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만 말리 홀트 여사는 생전에 최중증의 장애인과 함께 기거하면서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사업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발달장애인 재활시설인 홀트 일산복지타운을 중심으로 중증장애인 요양시설인 홀트 일산요양원이 있고요. 그리고 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홀트 보호작업장, 장애인 종합체육관, 주간보호센터, 장애인 그룹홈 등을 함께 운영해 왔습니다.

질문13 : 말리 홀트여사가 오랫동안 암 투병을 해 오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요?

답변 : 그렇습니다.

2012년에 골수암 진단을 받고서도 투병해 오면서 장애인들과 함께 해 오셨습니다.

여사는 암투병 이전까지는 장애가 가장 심한 분들과 함께 기거를 해 오셨는데요. 암진단 후 면역력이 약해지니까 함께 살았던 장애인분들을 다른 방으로 보내시고 혼자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요. 그 상황이 가장 안따까왔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방 한칸도 가지지 않으셨던 말리 홀트 여사, 결혼도 포기하고 이국 땅에서 평생을 부모 없는 아이들과 장애인을 위해 헌신해 오셨던 말리 홀트여사가 지난 5월 17일 별세하셨는데요.

그래서 세간에서는 말리 홀트여사 부모가 전 제산을 쏟아 부었던 홀트타운에 대한 후계라든가 재산권 행사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리 홀트 부모님께서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 누구에게도 물려줄 재산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늘 강조해 온 터라 가족 누구도 이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하고요.

그리고 후계에 대한 것도 이미 좋은 생각과 좋은 분들이 잘 운영하고 계시기 때문에 전혀 걱정이 없다는 점을 말리 홀트여사는 생전에 강조 해 오셔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습니다.

오늘 말리 홀트씨에 대해서 말씀드리는데 방송을 통해서라도 정말, 정말 수고하셨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요. 더불어 고인의 명복을 기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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