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물 톺아보기>

우리 사회에 뜨거운 한 획을 그은 장애 인물과 그의 열정적인 인생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장애인물 톺아보기>. 에이블뉴스 백종환 대표 함께 합니다. 어서 오세요.

질문1 : 오늘 소개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답변 : 우리나라 헌정사상 최초의 장애인 지역구 국회의원입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13대 국회의원으로 장애인 관련 입법활동의 선구자였고요.

그래서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장애인 당사자가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가를 깨달았고요. 때문에 장애인 정치세력화의 필요성을 이 분을 통해서 경험하고 자각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이 분의 대표적 활동, 대표적인 이력은 스스로를 빈민운동가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세간에는 소설가로도 이름이 더 많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소설, <어둠의 자식들> <꼬방동네 사람들>의 저자입니다.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지체장애를 갖고 계셨던 이철용 전 국회의원입니다.

질문2 : 많은 사람들에게는 소설 <어둠의 자식들>이나 <꼬방동네 사람들>의 작가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일텐데요. 장애가 있었어요?

답변 : 그렇습니다. 우리 장애계에서는 장애인복지법을 전면 개정하고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하는데 이 분이 국회의원으로 계시지 않았다면 과연 이 법률들이 만들어 질 수나 있었을까, 하는 그런 믿음이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장애계에서는 <어둠의 자식들>의 작가, <꼬방동네 사람들>의 작가보다는 그냥, 우리 장애계에서는 의원님이라 부르고, 국회의원으로 크게 자리를 잡고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이 정도로 이철용 전 국회의원은 우리 장애계에 크게 영향력을 미치셨던 분이다라고 말씀 드릴 수 있겠는데요. 이철용 전 의원님이 장애를 갖게 된 것은 첫돌 전에 결핵성 관절염으로 인해 지체장애 3급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철용 전 의원의 아버지는 폐병 환자였다고 하는데요. 아버지는 이철용 전의원이 태어난지 여섯달 만에 세상을 떠나 버려 아버지가 남겨준 것은 찢어지게 가난과 결핵균뿐이었다 그는 말했습니다.

그가 돌도 되기 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결핵성 관절염으로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장애인이 되었고요. 어머니는 장애아들을 키우느라 청상과부로 행상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질문3 : 어린 시절이 정말이지 쉽지 않았겠습니다.

답변 : 이철용 전의원이 1948년생이니까요.

어린 시절은 6.25 전쟁과 함께였는데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 아버지마저 없이 자란 아이, 거기에다 소위 절름발이 소년,

그래서 소년 이철용은 세상을 아주 거칠게 배웠다고 합니다.

어릴 때는 그가 지나가면 ‘저기 절름발이 간다.’ ‘찐따 간다’ 그렇게 놀리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면서 흉내를 내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돌을 던지고 도망가곤 해서 어린 시절에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소년 이철용이 거칠게 성장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의 사건이 말해 주었는데요.

어느 날은 서울 종로에 있는 한의원 집 아들이 뒤를 따라오면서 절름발이 흉내를 내면서 놀리더랍니다. 얼마나 서러웠던지 집에 와서 엉엉 울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가 단숨에 그 한의원 집에 쫓아가 대문을 박살을 내 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제부터 누가 너를 놀리면 이렇게 부숴버려라. 바보처럼 울지 말고.”

이후부터 이철용은 불편한 몸으로 살아남으려면 무기를 들어야 했고, 점점 악명도 높아졌다고 합니다. 악착같이 싸우다 보니 ‘깡다구’라는 별명생겼을 만큼 이를 바득바득 갈고 살았다고 이철용 전의원은 회상을 했었습니다.

질문4 : 소년 이철용이 성장하는 모습은 마치 뒷골목 깡패처럼 살아온 것 같은데요. 그런데, 어떻게 빈민 운동가가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답변 :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까, 그리고 어머니가 행상으로 생계를 꾸려가니 공부를 할 처지가 되지 못해서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세상으로 뛰어들었는데요.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돈 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 했고요. 돈을 벌기 위해서 악착같이 일했다고 합니다. 이 악착같음으로 인해 주변에서는 본인이 가장 돈을 잘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구두닦는 터를 20-30개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구두닦이 100여명이 이철용을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실상 이철용은 왕초가 되어 있었던 거죠. 해서, 구두닦이 아이들 공부라도 좀 시키기 위해서 1972년에 야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메리야스 도매시장도 꽤 크게 운영하면서 1974년에는 구두닦이들이 공부하는 야학교를 ‘은성학원’이라는 간판을 달고 좀 더 규모 있게 운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야학교에 손학규 대표 등 명문대 학생들이 선생님으로 왔고, 빈민운동가 허병섭 목사를 만났는데요. 야학교에서 만난 손학규 대표, 허병섭 목사 등등의 영향으로 빈민운동가로 변신했다고 합니다.

특히, 허병섭 목사는 뒷골목 깡패 이철용한테 성경책을 읽어보라고 주었더니 이철용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허병섭 목사이 증언에 따르면 이철용이 말하길 성경에 나오는 예수라는 남자는 뒷골목 조폭보다 더 뜨겁고 활기차 더랍니다. 그래서 예수처럼 멋지게 살고 싶은데 그렇게 멋지게 사는 것은 혼자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잘 사는 것이었고, 이 사실을 깨닫고 뒷골목 건달에서 빈민운동가로 변신했다는 것입니다.

질문5 : 1970년대 초반 평화시장, 빈민운동을 했다고 한다면 당시 유신정권하에서 이철용씨의 빈민운동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답변 : 물론이지요. 수배, 도피, 구속과 고문이 이어졌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당시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가 심해 국민투표를 했는데, 투표용지를 뭉텅이로 갖고 다니는 놈이 있어서 신고했더니 도리어 신고한 본인을 국민투표법 위반으로 구속됐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20일 만이던 1975년 2월 10일에 구속이 되었는데요. 처음으로 감방 생활을 했는데 정의로운 일로 수감된 것이어서 인지 감방 생활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이철용 전 의원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간첩으로 몰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40일을 지냈고요. 1979년 결혼식을 가장한 대통령 직선제 요구했던 그 유명한 YMCA 위장 결혼식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속과 석방이 되풀이되면서 도망자 생활을 하게 도는데 가족들한테 이철용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사람답게 살기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 습자지에 편지 형식으로 써 내려갔는데요.

이때 썼던 글이 1980년에 출간된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베스트셀러로 탄생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빈민운동 경험을 담아 쓴 책 <꼬방동네 사람들>까지 연이어 히트를 치면서 그야말로 이철용은 느닷없이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되었던 것입니다.

질문6 : 그래서 국회의원으로 다시 한번 변신하는군요?

답변 : 국회의원으로의 변신은 본인이 원해서 되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인기 작가가 된 것이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처녀작 소설 <어둠의 자식들>이나 두 번째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의 한 달 인세가 그 당시 집 한채 값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돈으로 서울 강북구 삼양동에 공부방도 내고 어린이집을 내고, 이웃들에게 이발도 해주고 침도 놔주며 동네를 누비고 다녔답니다.

그 당시 빈민운동가 이철용의 모토는 살아가려면 기술이 적어도 하나는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1인 1기를 강조했고 그래서 주민들에게 이발이나 침술을 배우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민들에게 인기를 누렸고 지지하는 인기 작가가 되었던 거죠.

해서, 정치권의 러브 콜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 와중에 당시 평민당 총재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스카웃으로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도봉을 지역구에서 당선된 것입니다.

질문7 : 국회의원으로 당선돼서는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셨군요?

답변 : 그렇습니다.

빈민운동을 하면서 ‘조개가 상처를 입지 않고서는 진주를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이철용은 국회의원이 된 이후부터 말씀하신 것처럼 장애인 문제에 주력하게 됩니다.

이철용 의원은 지체장애 3급으로 걷는데 불편은 하지만 목발을 사용하는 분도 아니었고, 더군다나 휠체어를 타야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만, 그런데요, 국회 등원 첫날부터 이철용 의원은 휠체어를 타고 국회 계단 앞에 나타나서 ‘국회의원이 국회에 들어 갈 수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고함을 쳤습니다.

당연히 국회 경위들이 달려와서 ‘모시겠다’고 했지만 다 뿌리치고 “휠체어가 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냥, 이것도 하루의 시위로 그치지 않고 동료의원 130명의 서명을 받아 이틀 만에 국회 의사당에 경사로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점차적으로 국회 의사당은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도 설치되고 시각장애인도 도움 없이 점자로 다닐 수 있는 길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질문8 : 장애당사자로서 장애계에서도 기대가 크셨을 것 같은데 입법 활동은 어떠하셨는지요?

답변 : 이철용 의원이 국회의원이 되기전까지는 장애계에서 활동을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리 기대를 하지 않았지요.

뿐만 아니라 그 당시만 하더라도 엄청나게 높으신 국회의원님께서 장애인 복지를 위한답시고 특별하게 입법활동을 할까 하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등원 첫날부터 휠체어 시위를 하고 해서 아주 놀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이 국회의원이 되었던 1989년에 우리나라 장애인문제에 있어서 가장 우선순위는 첫째도 먹고 사는 것, 둘째도 먹고 사는 것, 그러니까 생존권의 문제가 가장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애인복지와 관련한 법률이 당시 심신장애자복지법이 있었는데요.

법률을 있는데 모든 조항들이 하든 안하든 상관이 없는 그냥 모양만 있는 법률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철용 의원이 해도 되고 안해도 상관이 없는 권고 조항으로 이루어진 법을 의무 조항으로 바꾸어 나가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장애자라는 용어를 장애인으로 바꾸게 되죠.

이로 인해서 오늘날의 장애인복지법으로 전면적 개정을 하게 되었고 장애자로 불리던 용어도 장애인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장애인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서 장애인도 당당히 일해 돈을 벌 수 있도록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정하는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당시 이철용 의원은 100인 이상 사업장에 장애인 5% 고용을 주장했는데, 당시 여당인 민자당에서 500명에 1%로 하자고 해 절충해서 300명 이상 사업장에 2% 장애인을 고용한 것으로 결정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당시 이 법을 제정하는데 국회 환경노동위 소속의 노무현 의원, 이해찬 의원, 이상수 의원 등 노동위 3총사들이 많이 도와줘 덕을 봤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애인 문제에 대해서 이철용 의원은 장애인 당사자로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 장애인 관련 예산이 획기적으로 늘어났고요.

정계를 떠난 후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힌 점도 이철용 의원의 생애에 가장 보람있고 뿌듯한 일이 장애인을 위한 법률 정비작업이었다고 하는 내용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철용 국회의원이 활동한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의정활동 중 분명히 장애인 입법활동의 초석을 다졌던 분이란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입니다.

질문9 : 이철용 의원 이후에 장애인 국회의원이 각 당에서 비례대표로 경쟁하듯 배출됐었죠?

답변 : 그렇습니다. 이철용 의원이 13대에 국회의원이 되었는데요.

문민정부와 함께 했던 14대 국회에는 건너뛰고 김대중 정부에서, 그러니까 1996년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15대에서 처음으로 이성재 변호사가 장애인 당사자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됩니다.

그리고 17대에 들어와서 장향숙 의원, 정화원 의원, 18대 이정선, 박은수, 정하균, 곽정숙 의원, 19대 김정록, 최동익 의원까지 총 9명의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배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재 활동중인 20대에서는 그 맥이 끊기긴 했지만 이철용 의원 이후 비례대표가 늘어났고, 18대에서는 4명의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활동한 점은 정말 대단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장애인 비례대표 국회의원들의 평가는 이철용 의원의 활동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데요.

이철용 의원은 장애인 대표주자도 아니었고 지역구로 당선됐음에도 국회 의정활동에서 장애인 문제에 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이후에 장애인 국회의원들은 장애인 문제에 그리 큰 업적이 보이지 못했다는 평가가 대조를 이룹니다.

그로 인해 20대 국회에 비례대표를 한명도 배출시키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고도 말하고요.

그러하니 이철용 의원이 장애인 문제에 얼마나 열정적이었나의 척도로 보기도 합니다.

질문10 : 5공 청문회에서도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답변 : 1989년이었죠? 5공 청문회에서 증언하고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단상 앞에까지 와서 “살인마”라는 ‘돌직구’를 날린 인물이 바로 이철용 의원 아니겠습니까?

그의 의정 활동하는 모습을 보고 동료 의원들이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붙혀 주기도 했습니다.

질문11 : 현재도 장애인 관련 일들을 하고 있나요?

답변 : 이철용 전의원은 1996년에 장애인문화예술진흥개발원을 설립하고 최근까지 이사장을 맡아 왔습니다. 이 단체에서는 장애예술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요.

매년 수차례씩 공연으로 무대를 올리면서 장애 예술인들에게 공연 기회도 주고요.

비장애인 전문 무용수들과 함께 합동 공연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육성하는데 초점을 두고 단체 활동을 해 오셨었습니다.

그런데 70세를 넘기시는 2년 전부터 춤의 대가이신 윤덕경 서원대 교수께 이사장을 넘기시고 지금은 뒤에서 후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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