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3일은 국제연합이 선포한 ▩세계장애인의 날▩이다. 국제연합이나 개별 국가가 장애인의 날과 같은 특정 기념일을 제정하는 이유는 해당주제와 관련된 사회일반의 이해를 증진하는 한편 관련 당사자들의 사기와 의욕을 고취하고 관련 정책을 개발하는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국제연합(UN)은 연중 40가지에 달하는 특별한 날을 선포하는데 12월만 해도 ‘세계 에이즈의 날(1일)’, ‘세계 자원 봉사자의 날(5일)’ 등 일곱 가지의 특별한 날이 있다.

세계장애인의 날이 제정된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1975년 제30차 UN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인 권리선언▩에 직접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선언에서는 ‘장애인은 이 선언에서 제시한 모든 권리를 향유한다. 이들의 권리는 여하한 예외도 없고, 또 인종·언어·종교·정치 혹은 기타의 신념·국가 또는 사회적 신분·빈부·출생·장애인 자신 또는 그 가족이 처해있는 상황에 따른 구별이나 차별이 없이 모든 장애인에게 인정된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 같은 선언의 내용은 국제연합이 선포한 1981년 '세계장애인의 해' 표어인 '완전한 참여와 평등'으로 연결된다.

국제연합은 ▩UN 장애인 10년(1983∼1992)▩ 계획을 발전시켰고, 그 뒤를 이어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위원회(ESCAP)는 ▩아·태 장애인 10년(1993-2002)▩ 계획을 제정하였다. ▩아·태 장애인 10년▩ 계획이 추진된 것은 ▩UN 장애인 10년▩의 선포로 세계적으로 장애인문제에 대한 인식에 큰 변화가 나타났고, 장애발생의 예방 및 장애인의 재활문제 등에서 큰 진전이 있었으나, 아·태 지역의 많은 개발도상국과 저개발국에서 장애인 현실은 별로 진전된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선언에서는 UN 사무총장이 가맹국과 국제기구 회원국의 재정이 허락하는 대로 다음 사항을 준수하도록 권고하였다. 즉, 새로운 ▩장애인 10년▩의 행동계획과 실행 프로그램을 만들고 추진할 것, 장애인들이 보다 쉽게 빌딩이나 공공시설물, 교통 및 통신시설, 정보, 교육, 훈련, 또한 기술적인 도움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적인 원칙이나 법을 제정하고 시행할 것 등이었다.

한편 방금 소개한 두 종류의 ▩장애인 10년▩ 계획을 이행할 의무를 지닌 우리 나라의 경우 1998년 12월 9일에 ▩한국 장애인 인권 헌장▩을 선포한 바 있다. ‘국가와 사회는 헌법과 국제연합의 장애인 권리선언의 정신에 따라 장애인의 인권을 보호하고 완전한 사회참여와 평등을 이루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여야 한다’는 전문 내용에서 보듯 장애인 인권보호와 복지증진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당위를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국가·사회가 지향해야 할 바는 ▩인권헌장▩ 13개항에 잘 소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제1항에서는 ‘장애인은 장애를 이유로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및 문화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 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하였고, 제2항에서는 ‘장애인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소득, 주거, 의료 및 사회복지서비스 등을 보장받을 권리를 가진다’ 고 천명되어 있다.

이제까지 소개한 ▩선언▩이나 ▩10년 계획▩ 및 ▩헌장▩대로 우리 나라의 장애인 인권향상과 복지증진이 이루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본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경우 ▩선언▩은 추상적인 지향을 밝혀놓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바꿔 말해 어떤 ▩선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실질적인 장애인 인권신장이나 복지증진을 저절로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종종 ▩선언▩은 현실을 호도하고 은폐하기 위한 겉치레로 이용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에 ▩장애인 인권헌장▩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인권이 보장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되는 소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21세기에 접어든 한국사회에서 장애인 인권수준과 복지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국가살림을 꾸려갈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에 물리적인 장애 때문에 장애인들이 투표권을 행사하기 힘든 것이라든지, 1999년까지 일부 장애인시설에서 강제로 불임수술이 이루어졌다든지, 수도권 전철의 리프트사고에 대한 대책이 미진하다든지, 에바다를 비롯한 여러 시설들의 인권유린문제가 여전히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있다든지 하는 사항들에서 ▩선언▩이나 ▩헌장▩과 동떨어진 장애인 인권보호수준을 읽을 수 있다. 연말연시만 되면 ‘복지시설에 온정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들에서 엿볼 수 있듯 국가책임보다는 시민의 자선에 기대는 복지, 장애인 자신과 그 가족에게 과도하게 부담을 지우는 복지, 힘있는 국가기관일수록 장애인 의무고용비율 2%보다 훨씬 낮은 고용율을 보이는 복지 등에서 두 차례에 걸친 ▩장애인 10년▩ 계획이나 ▩선언▩과 ▩헌장▩에 제시된 기본적인 복지권고들이 우리 나라 장애인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란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둔 현재의 상황은 장애인 인권신장과 복지증진을 위한 좋은 기회일 것이다. 장애인 자신과 그 가족 및 장애인 인권과 복지에 관심을 갖는 유권자들은 어떤 방법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정치과정에 반영할 수 있을 것인지를 심각히 고려한 후 직접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꼭 대선 만이 아니라 각급 선거과정에서도 이러한 기조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애인이 일방적으로 보살핌을 받는 대상, 즉 ‘사회적 타자’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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