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다섯번째는 장려상 수상작인 이윤화 씨의 ‘떨리는 목소리로 어설프게라도’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어설프게라도

이윤화

1년 전 부서 내 비정규직 직원 한 명의 계약이 만료될 즈음이었다. 경영진은 그 직원의 계약 만료 후에는 정원을 줄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 업무는 최근 동 업종의 타 회사들이 위탁하는 추세에 있는 일이다. 경영진은 자연 결원을 충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차츰 위탁으로 전환하려는 듯했다. 그 파트 직원들의 반발이 거세고 그로 인한 업무분장의 어려움이 다른 파트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가 되자, 수일 째 사무실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방안을 찾기 위한 부서 회의가 열렸다.

 

이런저런 의견들이 나왔지만, 이미 위에서 충원을 안 해주겠다고 결정한 마당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전무하다시피 했다.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 남은 사람들의 업무 가중이 심각하다며 우는 것 말고는 다른 묘안이 없어 보였다. 그런 중에 한 동료가 제안했다.

“회사에서 ‘장애인 고용 촉진 및 직업 재활 법’에 따른 의무 고용률을 채우지 못해 부담금을 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차라리 부담금에 조금 더 보태서 가장 바쁜 시간대에 시간제로 장애 인력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는 건 어때요?”

“어, 그거 좋은데요?”

나는 정말 좋은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다른 동료가 경영진에서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며 비관했다.

“장애인을 고용했다가 사고가 나면 산재나 공상(공무상 상해) 처리로 발생하는 비용이 부담금보다 더 많아서 그간 꺼려왔다고 들었어요.”

‘비장애인은 사고 안 나냐?’며 속으로 혼자 어이없어하고 있는데, 또 다른 동료가 덧붙여 말했다.

“우리 부서 일에 장애인을 고용하는 선례를 남기면 안 돼요. 우리 일이 가볍고 우스워 보일 수 있어요. 난 반대예요!”

순간 저항감이 솟구쳤고 심장박동은 빨라지고 얼굴은 달아올랐다.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가슴이 너무 두근거렸다. 흥분해서 목소리가 떨릴까 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후 동료들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회의가 끝날 무렵에서야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겨우 한마디를 했다.

“사고 위험은 비장애인에게도 있는 거고, 반나절 정도지만, 아쉬운 대로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데다, 회사의 비용 발생도 크지 않으니 일단 품의를 올려보죠.”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장애인이 하는 일이라서 가볍고 우습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 나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장애아의 엄마이면서, 심지어 13년 이상을 장애아 엄마라는 정체성을 갖고 살면서, 장애에 대한 몰지각을 마주하는 순간에 대응할 어떤 논리도, 용기도 갖추지 못한 내가 너무 싫었다.

지금껏 직장동료들에게 아이의 장애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아니 철저히 숨겨왔다. 내가 장애아의 엄마인 것은 사적인 영역이고, 직장은 직업인으로서 내가 일하는 곳이라는 구별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에 대해, 나의 마음 상태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온전히 다 설명할 수가 없어서다. 온전히 다 설명하지 않으면 멋대로 오해하고 넘겨짚거나, 원치 않는 위로와 동정 또는 그 모두를 숨긴 과도한 친절로 나를 대할 것만 같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이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은유(2016)「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 9쪽)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장애와 딱 붙어살면서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지내왔다.

 

둘째 아이의 발달장애 진단을 받던 날의 나를 기억한다. 누구나 그렇듯 느닷없이 닥친 불행 앞에서 나는 현실 감각을 잃었다. 밀려드는 감정의 쓰나미에 휘청거렸다. 자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됐을 때 다수의 부모들이 갖는 죄책감과, 불행이나 죽음에 맞닥뜨린 이들이 갖는 감정(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에 더하여, 어떤 낯선 감정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에는 그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야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게 되었다. 수치심이었다.

 

아이의 장애는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인과관계로 일어난 일이 아닌데,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나는 내 아이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내가 장애아의 엄마라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나에게 일어났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자존심 상할 일인가 하는 물음이 계속 일었다. 아이와 나는 그대로인데, 분명 존재가 달라진 건 아닌데, 내가 아이를, 나를, 내 삶의 모두를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돌봤다. 퇴근 후에, 오후 반차를 내가며 열심히 아이를 치료실에 데리고 다녔다. 그렇게 밖으로는 엄마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매 순간 수치심과 싸우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는 곧잘 주눅 들고 위축됐다. 지하철과 버스와 공원에서, 내 아이로 인해 비장애인들이 불편할까 봐 눈치를 보고 미안해했다. 타인들 속에 있을 때, 자꾸 아이를 숨기고 싶었다. 그럴 때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같은 무게로 나를 미워하는 마음도 커졌다. 그렇다고 아이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수가 있나? 누군가를 부끄러워한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지 않나? 내 안의 모순에 휘둘리며 싸우느라 아이와 눈 맞추고, 웃어주지 못한 세월이 길었다. 그러느라 나름의 속도로 자라고 적응하며 자기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아이는 보지 못했다.

 

둘째 아이가 발달장애가 아닌 지체장애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적이 있다. 비교할 수 없는 일을 비교하는 중에 오랜 수치심의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가 지체장애인이라면 나는 아이의 장애를 부끄러워하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자기표현 능력과 의사소통, 경제활동 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장애를, 아니, 사람을 차별하는 마음이 무의식 속에 있음을 보게 됐다. 그러니까 나의 수치심은 장애가 아닌 ‘발달장애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었다.

 

회의 중 장애인의 사고 위험도가 높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와 장애인 고용으로 우리 부서 일이 가볍고 우스워 보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속 저항감의 크기가 달랐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동료의 말을 반박할 논리와 용기가 없었던 게 아니라, 그런 생각과 태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살고 있지 못하는 내게 그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외치는 무의식에 제동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나의 정서적 결벽증은 그렇게 자주 생각과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을 막곤 했으니까.

이제 와 1년 전 동료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해본다.

“장애인을 고용하는 선례를 남기면 왜 안 되나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는 건 좋은 거, 아니 당연한 거 아닌가요? 장애인이 하면 왜 우리 일이 가볍고 우스워 보인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만 18세 된 발달장애 아이와 함께 살아오며 알게 된 대로, 깨닫게 된 대로 살지 못하더라도, 목소리를 내고 싶다. 논리를 가지고 그럴싸하게 말할 수 있을 때를 기다릴 게 아니라, 떨리는 목소리로 어설프게라도, 필요한 순간에 끝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내고 싶다.

그러다 보면 능력주의와 쓸모를 요구하는 세상에 그저 순응하며 살아온 나도, 지적 능력과 자기표현이 부족하고 훗날 경제활동 가능성이 적을 내 아이를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사람은 누구나 그 자체로 차별받지 않고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라고, 단단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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