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8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스토리텔링 공모전 ‘일상 속의 장애인’은 장애인과 관련된 일상 속 이야기들을 통해 장애인식개선을 도모하고자 2015년부터 진행되고 있다.

올해 공모전 결과 박관찬씨의 ‘청년은 오늘도 첼로를 연주합니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 번째는 장려상 수상작인 김미나 씨의 ‘그럼 됐어’이다.

그럼 됐어

김미나

나는 중도장애인이다. 발병하기 전까지는 운동 신경이 무척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몸을 쓰고 움직이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던 중 바쁜 일을 처리할 때면 하이힐을 신고 뛰었고, 여름엔 래프팅을, 겨울에는 스키를 즐겼다. 가끔 높은 산을 정복하는 희열을 느껴보기도 했다. 할 수 있는 것, 갈 수 있는 곳엔 큰 고민하지 않고 도전을 하며 이십 대를 보냈다.

29살에 첫아이를 낳고 입소한 산후조리원에서 혼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리원은 두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 층 위에 있는 식당에 갈 때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고 했다.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막 놓친 나는 계단을 후다닥 뛰어 올라갔다. 식사 후, 조리원 원장님께서 나를 불렀다. “산모가 계단을 뛰어다니면 나중에 무릎이 시큰거립니데이. 몸조리하러 왔는데 병 얻어 나가면 안 되잖아요.” 하시면서 걸어 다니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그런데 그 일이 45년 인생에서 내가 뛴 마지막 기억이 되고 말았다.

신생아를 데리고 집에 오던 날, 차에서 내려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일곱 개의 계단을 오르는데 다리가 휘청거려 재빨리 손으로 난간을 잡았다. 피곤하거나 체력이 떨어져서 다리의 힘이 떨어진 것과 차원이 달랐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만져 본 뼈대 없는 무른 찰흙 덩어리 같다고나 할까. 다리에 감각은 있으나 무기력했다. 십여 년 전부터 두 동생을 괴롭히던 근육병이 드디어 내게도 본색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나의 힘듦을 내색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자식 셋 중에, 너 하나만이라도 건강해라.” 하시며 눈물을 흘리셨던 부모님과 두 동생의 병이 유전질환이라는 것을 알고도 나와의 결혼을 선택한 남편 그리고 돌보아야 할 갓 태어난 아기가 있었다. 십 대 후반에 근육병이 시작되어, 뛰는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고, 앉았다 일어서거나 계단을 오를 땐 두 팔이 거들어 주어야 하고, 걷는 게 매우 힘이 들고, 자주 넘어져 다치는 두 동생들을 애잔하게 바라보았던 내가 뒤늦게 고난의 길을 따라가게 되었다고 해서 슬퍼하는 것은 사치였다.

날이 갈수록 힘이 없어지는 몸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동생 지나(가명). 오로지 엄마에게 매달리는 지나를 위해 당신의 삶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엄마. 신체장애가 있는 성인 자녀 둘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정년퇴직을 하시고도 여기저기 발로 뛰시던 아버지. 누나보다 진행 속도가 더디다는 이유로 묵묵히 혼자 견뎌 온 막내. 거기에 뒤늦게 마음의 짐을 하나 더 올려놓는 나. 인생의 불행은 선택이라고 했던가. 마음이 행복해지고 싶었다.

우리 세 남매의 정확한 병명은 디스펄린 근육병이다. 개인차가 있지만 대개는 십대 초반까지는 아무런 증상이 없다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심장과 먼 부위부터 서서히 근 손실이 나타난다. 하지부터 시작해 상지까지 그리고 장기로. 근육병 유형 중 진행 속도가 더딘 편이라고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비참해질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는 지나처럼 울기 싫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이라면 벌써 그러고도 남았을 터, 나는 담담하게 두 동생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가기로 했다.

까치발이 불가능해지고 뛸 수 없게 되었다. 괜찮다. 시간이 좀 걸릴 뿐. 걸으면 된다. 자꾸 넘어졌다. 괜찮다. 일어나면 된다. 아기를 업고 가다가도 넘어졌다. 괜찮다. 우는 아기를 달래기 위해 더 많이 안아주면 된다. 넘어지면서 발 등 뼈가 세 군데가 골절되어 수술을 했다. 괜찮다. 입은 안 다쳤으니 입원 기간 동안 밥 잘 먹고 같은 병실 환자들이랑 서로를 위로하며 수다를 떨면 된다. 다 나았는데 넘어져서 수술했던 그곳이 또 골절됐다. 괜찮다. 이번엔 그래도 한 군데만 부러졌다. 넘어진 자세를 돌이켜보고 낙법을 연구한다는 내 말에 사람들은 어이없다고 했다. 예전처럼 할 수 있는 것, 갈 수 있는 곳에는 도전을 했다. 장애물을 최대한 피해 갈 방법을 고민하면서. 위축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올 땐 잘하고 있는 거라며 자위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진행되는 병으로 인한 신체적 장애에 적응해 나가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었다. 발병한 지 10년이 지났을 때, 마음대로 안 되는 몸을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일어서는 내게 누군가가 난데없이 감사하다는 인사를 던졌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워하기도 전에 나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근육병을 앓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어떤 지인은 내게 “오래오래 살아.”라고 했다. 그들의 마음은 분명 진심인 것 같은데, 내 마음이 이상했다. 장애인 편의를 부탁할 때, “장애가 벼슬이냐?”라고 호통 치는 사람들과 싸우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나는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왜? 폭력으로 느껴져 매우 당혹스러웠다.

가만 보니 나도 장애인의 가족이었을 땐, 지나에게 그랬다.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 상처받은 동생에게 다 널 걱정해서 하는 말에 날 세운다고, 성질 좀 죽이라고 했다. 내가 장애인이 되었을 땐, 장애인도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고, 자기 효능감이 있어야 자존감도 높아진다고, 너의 우울증은 몸이 아니라 마음 때문이라고 혀 속의 칼을 휘둘렀다. 그 칼이 거울이 되어 내 모습을 비추었고, 부메랑이 되어 나의 민낯을 드러내게 했다. 어쩌면 내가 씩씩하게 사는 이유는 남에게 행복하게 보이고 싶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인생의 불행은 무작정 선택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다.

가족끼리 서로 상처를 주고받고 이해하고 공감했던 세월 동안 나만 거침없는 줄 알았더니, 지나도 꽤 과감해졌다. 올해로 발병한 지 25년이 된 지나는 독립보행이 거의 불가하다. 장애 등급도 몇 년 전에 이미 심한 장애로 변경되었다. 아주 짧은 구간은 보조기를 이용해서 걷지만, 그것마저 부상의 우려가 있어서 휠체어를 주로 사용한다. 부모님께 의지하지 않고도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여행을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난다. 여전히 한 번씩 슬럼프가 오긴 하지만 일상으로 회복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몸이 아파도 꾹 참기만 하시던 부모님은 자식들을 오래 돌보려면 당신들부터 건강해야 한다며 스스로 부지런히 몸을 챙기신다. 자식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가끔씩은 여행으로 며칠 동안 집을 비우기도 하신다. 여전히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는 막내는 속이 깊다. 결혼하고 세 명의 근육장애인을 겪게 된 남편은 자격증만 없을 뿐 장애인 활동 지원사 이상으로 우리들의 불편함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매일 빠져나가는 삼 남매 근육의 빈자리가 가족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으로 채워졌다.

“언니,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는데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면 누가 날 돌봐줄까. 그게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와.”

어느 날, 지나가 내게 말했다.

“지나야, 나는 뭐 나이 들면 자식하고 같이 살 것 같니? 나는 요양원에 들어가서 할머니들하고 같이 살 건데, 너도 나랑 같은 요양원에서 살자. 너랑 나랑 같이 기어 다니지 뭐.”

울먹이던 동생이 깔깔거린다. 지나에게 상처가 된 말은 없는지 살피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긍정 회로를 가동한다.

“언니,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청각장애인 별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남자를 거절하면서 ‘내가 장애인이면 너 만나야 되냐.’고 그랬잖아. 내가 깊은 공감 받았거든. 이해돼?”

“당연하지.”

어떤 말을 더 해주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던 찰나, 동생이 던진 말 한 마디.

“그럼 됐어.”

이심전심에는 긴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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