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마지막 열아홉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박진희씨의 ‘내 삶의 웃음, 기다림, 그리고 여행’이다.

내 삶의 웃음, 기다림, 그리고 여행

박진희

[나는 발이 없다. 왜? 걷지를 못하니까.]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은 이동에 제약을 두고, 나를 사방이 막힌 사각 틀 속에 옭아매둔다. 그래서 나는 슬며시 손가락을 움직인다. 손을 펼 때는 슬며시 움직여야 한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을 주고 지문의 마찰에 익숙해지는 편이다. 방바닥에 깔린 장판에 대하여, 나에게 장판은 가슴을 맞대고 이동하는 수단이지만 장판을 깐 사람의 입장에서 그런 것이 뭐 중요할까?

이 집에 이사 올 때 방문턱을 없애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점점 없어지는 방문턱에 대하여, 기존 여닫이문에 새로 박힌 못에 대하여. 입주 후 이동은 계속되고 흐릿한 장판을 길게 뻗은 손가락의 마찰에 의해 움직이는 가슴으로 닦아주었다. 손가락이 방에서 가장 먼저 나가는 지향이라면 나는 이 몸짓에 성공하는 기분이 들었다. 방 밖 장판의 냉랭함과 접촉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장판을 메운다면 땀방울을 믿을까? 장판을 믿을까? 인내를 마친 행위자로서 이 냉랭함의 정체를 무슨 수로 밝혀야 할까? 문을 닫아도 높아지지 않는 방문턱이, 후끈함이 사라지고도 내 밑에 깔려 있는 장판이 내 행위를 기억할 것이다.

엄마와 나 사이 서먹해진 간격을 이어주는 목소리가 전화기 저편에서 울린다. 나를 왜 장애인 시설에 두셨나요? 일 년, 이 년, 삼 년……. 잘 계신지 형상 없이 목소리에 멈춰있다. 나는 휠체어를 탔고 엄마는 그런 나에게 어부바 했지만 성장통은 심해졌다.

시설에서의 저녁이 원망 섞인 설익은 판단으로 천천히 잠식되는 동안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웅숭깊었다. 자립을 하고 사회로 나와 시간으로 벌어진 틈새를 메워주는 애잔한 목소리, 아픈 데는 없으시죠. 엄마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마음처럼 휠체어 바퀴를 굴릴 수 없었다. 가끔 목소리에 눈물짓다 탁자 위에 놓아둔 전화기를 무심히 바라보고 "엄마 나 사랑하지? 나도 엄마 사랑해요."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제 휴대전화기를 통해 전해진 목소리도 나에게 기대감만 갖게 했다. 저번 주에 날씨 탓으로 가지 못한 역사답사인 광주역사박물관에 내일 간다나 뭐라나. 코로나19 탓에 멈춰버린 휠체어 바퀴를 굴릴 수 있다는 기다림이 컸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저번 주에 그 목소리를 들은 후로부터 인터넷을 참고하여 간접적으로나마 그곳을 짓고 있었다. 서까래를 깔고, 주춧돌을 놓고, 검은색 기와로 할지 청기와로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공부방에서 연락이 왔다. 우천 취소도 아니고 비가 내릴지도 모르니 하루 전 날 역사답사를 취소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내가 짓고 있던 그곳은 목소리 몇 마디에 처참히 무너졌었다. 그런 그곳을 다시 지으려고 하니 처음과 같은 흥이 사라지고 높다란 기둥만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었다.

장애인 시설에 있을 때 내겐 이 사회가 그냥 먼 곳이었다. 그래서 멀다를 간혹 시간의 허비에 묻어두곤 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먼 곳을 찾기도 했지만 먼 곳은 내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은 매시간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 다른 이의 시간을 보태서라도 그곳에 가야 했다. 「먼 곳은 매일 사라지고 있어, 사라지기 전에 빨리 가봐야지.」 정말 먼 곳은 매일 사라지고 있었다. 산이 무너지고 바위가 굴러다니고 땅이 갈라지고 온전치 못한 것들이 매일 사라지는 소리는 가보기 전까지 들리지 않을 거야, 먼 곳을 그리면 거기까지였다. 내가 그리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알지 못했다. 이것으로 내 연필이 마모되어도 무엇을 그렸는지 알지 못했고, 허공에 스케치하는 것만 같았다. 멀다가 시간의 허비라도 내가 생각하는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먼 곳에 가야만 했다. 정말 먼 곳을 가는 도중 정말 가까운 곳은 매시간 무너졌다. 먼 곳에 대한 나의 상상이 불안해질 때면 소모되는 시간으로 볼 때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견딘다는 것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었기에. 소비하는 것이 너무 작아 더 큰 것을 견뎌야 했다. 그래도 나는 정말 먼 곳을 사유하며 정말 작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다. 그래야 시설에 더 머무를 수 있었다.

시설에서는 그랬다. 문에 의해 안과 밖이 나누어질 때, 우리에게 보이는 모습은 적을 수밖에. 장판 깔린 바닥에는 발자국이 마침표로 찍히고 휠체어는 발자국을 받아내고 밖에서 다시 밀고 오는 발자국 투성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곳에서 내리면 무릎이 발자국이 되고 발자국이 팔꿈치가 되는 복도에는, 우리의 발자국이 무성했다. 그곳에서는 문밖보다는 장판 깔린 바닥에 집중해야만 했다. 가끔 문밖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는 때가 있었다. 바람 한 줌이 끼어들 때, 안과 밖을 나누는 문이 서서히 열리는 순간이 있었다. 미풍으로 발자국을 지우는 때가 있었다. 지금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안과 밖이 마주할 때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고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있었다. 차별과 호의가 동시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문안에 있는 발자국 중 하나가 연기가 되어 사라져도 그냥저냥 한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는 문은 발자국과 맞닿아 있었다. 그래서 밤마다 우리는 문으로 발자국을 향했다. 문이 있는 곳으로 안과 밖 발자국이 모여들고 있다는 기대가 있었다.

역사답사를 위해 집결지인 복지관 앞으로 전동휠체어 바퀴를 굴렸다.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광주역사박물관으로 가면서 오랜만의 바깥나들이에 내심 설렜다. 화창한 봄 날씨마저 내 나들이의 응원군이 되어주었다. 공부방 선생님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과 조형물을 가리키며 광주 역사에 대해 설명해 줄 때도, 완만하면서도 날렵한 한옥의 처마곡선에 감탄을 자아낼 때에도 나는 전동휠체어 바퀴를 굴리기에 바빴다. 나는 이 답사에 참여한 장애인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고 기억 속에 그것을 차곡차곡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그랬고, 과거 광주의 모습이 조형물로 꾸며진 사각 면 주위를 뱅글뱅글 돌면서도 그랬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답사의 마지막은 단체사진 촬영이었다. 이곳에서 전동휠체어 바퀴를 더 굴리지 못한 아쉬움을 애써 감추고, 하나 둘 셋 외치는 공부방 선생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맞추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답사 뒤풀이, 나들이의 마지막은 웃음과 기다림이다.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오늘 있었던 답사의 소감만 말하려고 했는데, 오랜만의 나들이에 들뜬 나머지 요즘 즐겨 보는 텔레비전 드라마 이야기부터 연애 고민까지 목소리가 줄줄 쏟아지는 수도꼭지를 틀고 말았다. 뒤풀이가 끝나기 전 집에 일이 있다는 핑계로 슬쩍 빠져나와 남자친구와 노래 몇 곡 부른다는 것이 저녁 어스름이 거리에 가득했다.

뒤늦은 귀가를 마치면 언제나 그렇듯 어둠이 잔소리처럼 울린다. 도착해보면 활동보조서비스 끝나는 시간, 엘리베이터를 지나 복도, 현관은 늘 그대로인데 마음이 행동을 지배해서 웅크림이 심해진다. 문을 열고 맞이한 활동보조인, 화면을 빠끔히 드러낸 결제 단말기에서 남은 시간을 골라냈다. 결제 단말기가 켜지지 않은 날의 저녁은 요의와 허기 사이에서 방황하고, 가족의 방문 메시지를 받은 날 아침은 결제 단말기 안내 음성처럼 상냥해진다. 활동보조서비스 바우처 시간이라는 말에 집중한다. 바우처 시간은 결제 단말기 서너 개를 거느리며 늘 내 의지보다 힘이 셌다. 결제 단말기는 어딘가 관심과 닮아있다. 알몸에서 느껴지는 체온처럼, 목소리에 반응하는 손발처럼 잠시라도 결정하는 것을 잊어선 안 되었다. 왜냐하면 결제 단말기가 꺼지더라도 날이 밝으면 안내 음성처럼 또, 남은 활동보조서비스 바우처 시간으로 생활해야 한다.

자립을 하고 선택한 것이 여행이다. 기차역 바깥으로 전동휠체어를 정차하면 낯선 풍경이 만드는 도시가 설렌다. 도로변으로 빽빽이 서 있는 건물들은 늘 배경이다. 여행의 정취를 얻으려면 전동휠체어 조이스틱을 잡은 손에 힘을 빼야 한다. 전동휠체어는 길을 가늠케 하고 등받이에 짐 가방을 매단 채 장애인콜택시의 이동권을 붙들고 앎과 실제의 경계에서 조각나있는 장면들을 하나하나 짜 맞춘다. 숙소와 행선지의 냉랭함을 익숙함으로 바꾸기 위해 요의와 허기와 시간이 한데 조이는 것도 잊어야 했다. 아스팔트 깔린 도로가 울퉁불퉁하더라도 바퀴 굴리는 것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쯤 되면 앎 속에 실제의 모습을 찍어 넣을 수 있을 테니까. 견문의 여백은 행동하기 나름이어서 전동휠체어가 지나간 풍경은 이번의 후기가 된다. 드디어 전동휠체어는 숙소로 들어서지만,

[아직 내 발이 되어 준 전동휠체어가 굴러가지 않은 곳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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