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여덟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최원호씨의 ‘최고 모범 커플’이다.

최고 모범 커플

최원호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상도동에서 오랜 시간 홀로 살았다. 그동안 나는 많은 걸 포기한 3포 시대 젊은이의 모범이 되고야 말았다. 연애도 결혼도 조기 포기했으며, 취업은 아주 늦게 겨우 했다. 하고 싶은 일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해 하는 일이라 어떻게든 그만둘 이유를 찾았고, 영혼 없이 출퇴근했으므로 참된 직장인은 아니었다. 적당한 돈, 적당한 무기력, 부족한 인간관계, 넘치는 TV 시청과 게임, 이런 생활은 익숙함으로 점점 굳어졌다. 서울에 산 지 10년 넘는 동안 서울은 많이 변했지만, 나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서울 평범 시민의 나날을 보냈다.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가던 나는, 어느 날 아카시아 향에 취해 인근 국사봉이라는 곳을 처음 갔다. 집을 알아보고, 이사 올 때 이리 좋은 산이 가까운 곁에 있는지도 몰랐는데, 돌이켜 보면 국사봉은 내가 모르고 선택한 아주 큰 축복이었고, 국사봉 산책의 시작은 앞으로 더 큰 행운의 모티브였다. 내가 숲세권에서 산다는 걸 알게 된 후 시간이 날 때마다 그 행운을 마음껏 즐겼다. 빌딩 숲의 화려함이나 그 야경보다는 녹색이 좋았던 나는 조금씩 산책 거리를 늘려갔고, 조심스레 더 탐험을 하다 보니 알게 됐다. 그곳엔 국사봉 숲속 작은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처음엔 그 도서관을 그냥 지나치는 날이 많았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들어가 구경도 하고 책도 빌리게 됐다. 숲속 도서관은 동작구 다른 도서관이랑 다 연결돼 있었다. 이곳에서 관내 다른 도서관 책을 빌릴 수 있었다. 어느덧 국사봉 숲속 도서관은 산책의 필수 코스가 됐다.

국사봉에 더욱 자주 들르며 국사봉 도서관이 사람들에게 벗뜰이라 불린다는 걸 알게 됐다. 또한, 도서관끼리만 연결된 게 아니었다. 도서관 주변 소리샘 복지관, 각종 생협 단체, 어린이집 등과도 연결돼 있어서, 뭔가 행사가 있으면 연대해서 함께 했다. 한마디로 주민들 삶 속에 깊숙이 파고든 일상 터전 같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에 자주 방문하다 보니 그곳 관장님과 익숙해지고 일상적인 몇 마디도 오고 갔다. 그렇게 시작된 친분에 관장님은 인근 복지센터에 근무 중인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해 줬다.

그 복지사님은 내게 ‘스몰 스파크’라는 서울시 행사에 참여해보라고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서울시 복지 사업인데, 장애인 한 명이 끼워서 함께 활동하는 그 모임에 활동비를 지원해 주는 사업이었다. 서울시의 좋은 취지이긴 하나 그 당시 나에겐 무리수였다. 그러나 맑은 눈동자로 추천하는 복지사님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결정한 일에 부딪혀야 했고, 걱정이 하나 있었다. 솔직히 난 살면서 장애인에 대해 거의 관심 없었다. 3포를 해버린 나 역시 이 시대가 낳은 약자 중의 약자라고 이기적이고 나약하게 생각했기에 그들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뭔가 찜찜한 마음을 품고 주명이라는 이름의 장애인과 두 명의 비장애인 청년이 모인 곳으로 갔다. 각자 나이 차이도 있고, 남자 넷이 모이는 거라 상당히 어색하리라 생각하니 가기 싫어 잠이 안 올 정도였다. 이렇게 구성된 우리 넷에겐 50만 원이라는 거금이 정말로 주어지고야 말았다. 나는 눈 꾹 감고 첫 모임처럼 맛난 밥이나 먹고 오자 그런 마음으로 모임에 참석했다. 하다 보면 ‘네 번 금방 끝나겠지?’ 그런 심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고, 일이 점점 꼬였다. 우리 조는 다들 내성적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한 명이 리더로 이끌어 가는 게 아니라 ‘오늘 모임 주인공은 나야 나!’라는 이름으로 각자 한 번씩 그날 모임 주최자가 되기로 합의했다. 그날 모임은 주인공이 가장 좋아하는 것을 다 함께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 넷이서 오리배도 타고, 영화도 보고, 찜질방도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차례가 왔는데 고민이었다.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집에서 게임을 하거나 야구를 보는 게 취미의 전부였는데…. 나는 시무룩하니 야구를 보다가 겨우 생각했다. 야구장에 가서 내가 좋아하는 팀을 다 함께 응원하는 것으로! 며칠 후 우리는 잠실야구장으로 갔다. 그런데 거기서 알게 된 사실, 주명이가 나와 같은 팀을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주명이는 가장 즐거워했고, 같은 색깔 팀을 응원하는 나에게 묘한 동지애를 느끼는 것 같았다. 이 모임이 주명이로부터 주명이를 위해 시작됐는데, 그와 공통분모를 알게 되니 조금 흥미로웠다.

내가 계획한 야구장을 끝으로 무사히 스몰 스파크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주명에게 개인적으로 연락이 왔다. 우리는 문자 메시지로만, 연락해왔던 사이인데, 그는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했다. 나는 순간 많이 망설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돈은 다 끝났다. 이런 모임을 만든 서울시의 취지는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내 취지와는 상당히 벗어났다.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했지만, 왠지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주명이와 개인적으로 만났는데, 나는 그 자리에 나온 걸 바로 후회했다.

주명이는 나름의 직장을 갖고 열심히 사는 장애인 청년이었고, 그에겐 장애인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여자친구와 사귄 지 1년 기념으로 1박 2일 부산 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커플의 첫 여행이었다. 장애인 커플은 활동보조 선생님이 있어야 여행이나, 외출을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주명이는 여행을 가고 싶은데, 자기 활동 보조 선생님은 1박은 곤란하다고 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1박 2일 동안 보호자가 돼달라고 부탁했다. 활동보조 선생님은 국가에서 돈이라도 받고 하는데, 아니 그보다 돈을 더 준대도 안 할 건데, 아무 보상도 없이 내 시간 들여 보호자가 돼달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주명이는 기적 같은 1년이었다고 여행 가길 간절히 바랐다. 여행의 모든 비용은 자기가 대고 소정의 수고비도 준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돈과 시간부터 따진 내가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망설였는데, 어려운 부탁이라 그런 줄 알고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했다. 우리 커플의 1주년 여행에 함께하는 보호자가 돼달라고! 대다수의 여느 누구처럼 주명인 평범하고 예쁜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나는 결국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주명이는 평소 아이 같은 면이 있는데,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땐 더 아이같이 행복해했다.

사실 나도 여행이라는 것을 해본 지 정말 오래됐었다. 특히 부산에 가본 지 20년도 더 됐다. 내가 주명이의 보호자 역할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고, 그 여행이 주명이의 생각대로 잘 흘러갈지 모르지만, 어쨌든 가자. 부산으로!!

며칠 후 여행 날짜가 다가와 나는 주명이와 함께 서울역으로 갔다. 그리고 그날이 돼서야 비로소 알게 됐다. 주명이의 여자친구에게도 활동보조 선생님이 있다는 것을. 셋이 가는 거로 생각했는데, 그 부산 여행은 넷이 가는 것이었다. 활동보조 선생님은 주명이 여자친구의 휠체어를 밀어주며 환하게 웃었고, 나는 그녀의 그 웃음이 가식이 아니라는 건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가식은 나 같은 사람이나 생산하는 것이다.

그렇게 넷은 부산행 KTX에 올랐다. 주명이가 여자친구와 자리에 앉는 건 당연했기에 나는 자연스레 활동보조 선생님의 옆에 앉았다. 여성과 함께 부산을 간다는 것! 의도적이든 노력이든 우연히든 내게 기억도 나지 않은 이런 신비한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주명이가 만들어준 이 시간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자연스레 옆에 앉은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주명 커플이 마냥 행복해하는 만큼 우리의 이야기도 술술 풀렸다. 주명이가 내내 너무 좋아해서, 정말 좋은 일을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도 나를 좋게 본다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부산에 도착했고, 여기저기 맛집과 명소들을 돌아다녔다. 주명 커플은 여행에 만족한 듯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나와 활동보조 선생님은 주명이 커플 두 걸음 뒤에서 함께 걸으며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바닷가라서 좋고, 너무나 평범했던 내가 처음으로 특별해지는 것 같아서 더 좋았다. 나와 걸으면서도 둘에게 온 시선이 쏠려 있는 그녀가 얼마나 프로인지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도 주명이 커플을 자주 봤지만, 보호자로 온 건지 데이트 인지 착각할 정도로 설레는 순간이었다.

사실 내가 연애를 포기한 것은 성격 탓에 용기도 없었지만 한 번도 내게 기회가 오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패배자처럼 괜히 슬퍼하고 되지도 않은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붓느니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봤다. 하지만 주명 커플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랑을 포기했던 내가 누군가의 사랑을 응원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내가 더 행복했던 1박 2일의 여행이 끝났다. 나는 주명이에게 차마 수고비는 받을 수 없었다. 오히려 주명에게 밥을 사고 싶었다. 며칠 후 서울에서 넷은 다시 만났고, 함께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날 나는 생에 처음으로 용기라는 것을 냈다. 활동보조 선생님에게 매우 호감이 간다고 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주명이 덕분에 나를 좋게 봤는지, 튕기거나 밀당이나 그런 걸 하지 않았다. 우선 잘 지내보자고 했고, 그 유효기간은 상당히 짧았다. 며칠 후 우리는 진짜 커플이 됐다.

내가 아는 현존하는 최고 모범 커플인 주명과 희아는 그렇게 또 다른 예쁜 커플을 만들어 냈다. 늘 아름다울 수많은 없는 게 사랑이라는 걸 이미 잘 알지만, 그래도 시작 단계만큼이라도 실컷 기쁜 마음으로 이 최고 행운의 순간을 즐기고 싶었다. 나중에 일어날 일을 미리 걱정하는 것만큼 바보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그냥 지금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주명이처럼!

나는 그 행운을 겪으며 세상을 잘못 알고 손쉽게 결정한 젊은 날의 선택을 잠시 후회했다. 세상은 포기나 단절이 아닌 아름다운 연결이었다. 내가 무언가 선택한 순간 그 삶은 또 다른 것들로 연결되게 했다. 숲이 도서관이랑 연결되고 도서관이 장애인 복지관이랑 연결되고 복지관이 장애인이랑 연결해 줬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연 주명이가 나에게 소중한 애인을 연결해 줬다. 나는 나에게 온 이 엄청난 연결을 늘 소중히 생각하고 나로 시작된 또 다른 좋은 연결을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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