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세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박선주씨의 ‘나는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다’이다.

나는 소리를 귀로 듣지 않는다

박선주

꿈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5년 만에 다시 들은 새소리는 눈물이 나올 만큼 반가웠고, 세상의 소리들은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낯설지만 친근하게 느껴졌다.

처음 청력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는 20살이었다. 성인의 첫걸음을 떼는 새내기였기 때문에 보청기를 끼고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2년 후 돌발성 난청으로 청력이 더욱 떨어졌다. 그렇게 후천적 중증 청각장애인이 되었고, 의사 선생님은 이제 보청기에 의지하는 것보다 인공와우 수술을 추천하셨다. 어음인식률이 많이 떨어져서 입모양을 보지 않으면 대화가 어려운 상태가 됐을 때, 그제야 내가 얼마나 안 들리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2020년부터 전 세계적으로 도는 전염병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가 필수인 시대가 됐다. 대중교통에서는 물론 집 앞 공원을 갈 때도 사람이 있다면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 그렇게 모두가 코와 입을 포함한 얼굴 하관을 가릴 때마다 구화를 볼 수 없어서 답답했다. 거리두기가 완화되면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그 불편함이 점점 피부로 와 닿았다. 실내로 들어가 밥이나 커피를 먹기 위해 마스크를 내리기 전까지는 대화를 선뜻 시작할 수 없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은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을 주었다.

그런 외로움을 느꼈던 건지 그들은 언제부턴가 공공장소에도 서슴없이 마스크를 내렸다. 나와 소통하기 위해, 감염의 위험과 사람들의 시선을 무릅쓰고, 마스크를 턱으로 내리는 배려들이 얼마나 낭만적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내게 말을 붙일 때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늘 마스크를 내리고 입모양을 또박또박 발음해 주었다. 혹여나 그럴 여건이 없는 상황에는 휴대폰을 꺼내서 메모장이나 카카오톡을 통해 소통했다. 바로 옆에 있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해 타자를 치느라 바쁜 그들의 손가락을 볼 때는 형용할 수 없는 여러 감정들이 복받쳤다. 그들의 배려 속에서 따뜻한 시간을 보냈지만 그 배려도 여전히 불편함을 이겨내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대학교를 졸업했다. 흔히들 말하는 취준생이 되면서 여러 가지 고민에 휩싸였다. 카페에서 음료 하나를 주문할 때도 도움이 필요한 내가 회사에 취업해서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친구들이 배려를 해주는 덕분에 많이 도움 받고 있지만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는 어쩌지? 걱정으로 새벽을 감싸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렇게 인공와우 수술을 결심하게 됐다. 가족들의 걱정과 주위의 동정이 싫어서 덤덤한 척했지만 몇 년을 미뤄왔던 선택인 만큼 사실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컸다.

수술일까지 한 달간은 하루하루가 겁났다. 나의 선택에 의심이 들었다. 만약 기대치만큼 들리지 않는다면 실망할 내 모습에 고통스러웠다. 그럴 때 어디선가 들은 ‘신이 선물을 주실 때는 고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주신다.’는 말을 기억하며 기운을 냈다. 하루는 걱정이 너무 커서 친구에게 고민의 무게를 나눈 적이 있다. 그 친구는 나를 나비로 비유해 주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탈피의 고통을 겪는다고. 그 말은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단초가 됐다.

시간이 흘러 수술 전 날 입원을 했다. 수술을 하기 위해서 귀 뒤의 머리카락을 5cm 정도 잘라내야 했다. 흉터가 보일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티 나 지도 않고, 오히려 짧은 머리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자랑스러운 탈피의 흔적이랄까. 수술실의 적막한 공기는 무겁게 느껴졌지만 바로 수면 마취를 했기 때문에 긴장한 시간이 그리 길진 않았다. 그저 한숨 푹 자고 온다고 생각하니 이미 수술이 끝난 후였다. 며칠 뒤 퇴원을 했고, 회복하는 한 달간은 가족 말곤 아무도 만나지 못하며 집에서 휴양했다. 엄마가 차려주시는 건강하고 따뜻한 밥과 처방받은 약을 부지런히 챙겨 먹으며 푹 쉬었다. 수술한 쪽에 이어폰을 껴봤는데, 음량을 최대로 키워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제 수술한 왼쪽 귀는 희미한 잔존청력마저 아예 없어졌단 걸 깨닫고 기분이 미묘했다.

한 달 후 수술 부위의 붓기가 어느 정도 빠지고, 드디어 처음 인공와우를 착용하러 병원에 갔다. 교수님께서 내가 말을 다 배운 후천적 장애인이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애인들보다는 비교적 효과가 좋을 것이라고 하셨다. 와우의 소리를 조정하고 귀 뒤쪽의 머리에 붙였는데 처음에는 기계음 같은 소리가 너무 강해서 이질감이 들었다. 최소 2개월은 지나야 어느 정도 소리 분별이 가능하다는데 너무 다행히도, 나는 당일부터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날 친구를 만나서 함께 경복궁에 갔다. 함께 나란히 앉아서 고요한 세상의 속삭임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들려오는 짹짹거리는 소음에 친구에게 물었다.

"이 소리 대체 무슨 소리야?"

"이거 새소리야! 우와 이 소리도 들려?"

찍찍 짹짹 새가 지저귀는 소리, 부와아앙 오토바이가 도로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소리, 파삭 자작자작 질감에 따라 달라지는 비닐 구기는 소리 등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다양한 생활 소음이 차차 들려왔다. 의성어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 소리들이 나의 까맣고 작은 인공와우를 통해 전해져왔다. 조금 낯설지만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였다. 그 간의 고민들과 고생이 잊힐 만큼 기뻤고 행복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엄마의 입모양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은 채로 처음 대화했을 때 엄마는 내 얼굴을 마주 잡고 눈물을 흘리셨다. 비로소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신 듯했다. 방에서도 엄마가 부르는 말에 대답을 하자 신기하다며 용건도 없이 나를 자꾸 불러보셨다. 소리가 어느 정도 들리기 시작하며 몇 년 만에 전화도 걸어보았다. 아직 말소리를 완벽하게 분별하기엔 좀 이르지만 스피커폰을 켜서 와우에 가까이 대면 간단한 대화가 가능했다. 처음 전화를 해본 날 너무 기쁘고 신기해서 오빠, 아빠, 동생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모두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전화 소리에 휴대폰을 들었는데 내 이름이 떠서 깜짝 놀랐다고 했다. 마스크를 끼고도 친구들의 말을 알아들으면 그들은 나를 안아주며 너무 잘 됐다고 축하해 주었다. 이런 응원과 축하들이 여전히 감격스럽고 꿈꾸는 것 같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다.

요즘 꽤나 바쁘게 지내고 있다.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며 할 일이 많아졌다. 친구와 전화로 수다를 떨어야 하고, 자막이 있는 외국영화 대신 한국 영화를 보며 대사를 직접 들어야 한다.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 싶고, 여러 악기 소리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도 감상해야 한다. 듣는 연습을 많이 해서 더 많은 소리를 접하고 싶다. 그리고 이 모든 할 일들이 이젠 겁나지 않고, 설레고 두근거린다.

나의 결심, 나의 짧은 머리, 나의 목소리를 사랑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사랑한다. 비로소 탈피의 시간 끝에, 선물 같은 이 순간을 너무나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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