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한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주유나씨의 ‘나는 니모의 언니다’이다.

나는 니모의 언니다

주유나

내 동생은 니모다.

그래서 남들보다 헤엄이 느리고 방향을 트는 것도 힘들다. 다른 물고기들처럼 멀리 헤엄치는 것은 고사하고 큰 바위를 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니모의 지느러미가 되어주려 했다.

‘니모를 찾아서’라는 영화를 알고 있는가? 한 쪽 지느러미가 짧게 태어난 물고기 니모가 자신의 아버지와 친구들과 함께 위험천만한 모험을 떠나게 되는 내용이다. 니모는 이 영화 속에서 자신의 작은 지느러미를 부끄러워하지도 원망하지도 않고 ‘행운의 지느러미’라고 부른다. 내가 본 수많은 영화들 중 장애를 다룬 부분에서 가장 캐주얼한 영화가 아닐까 싶다. 그가 이렇게 자신의 지느러미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여길 수 있는 배경엔 영화 속 바다 친구들의 차별 없는 대우가 깔려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어떻게 될까?

내 동생은 하지 관절이 돌아간 채로 태어나, 옹알이를 할 때부터 교복을 입게 되기까지 수많은 수술을 이겨낸 끝에야 겨우 걸을 수 있게 되었지만, 걸음이 남들과 다른 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그럼에도 활기찼다. 동네 친구들과 곧잘 어울렸고 자신의 고통을 친구들에게 감추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육지의 아이들은 차별과 혐오를 배워갔고, 동생의 작은 지느러미는 어느새 마음껏 미워해도 되는 증표가 되어버렸다. 어디를 어떻게 들어가든 항상 바닥에 깔려있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따듯한 온기와 희망은 찾을 수 없었다.

동생이 아픈 것은 다리뿐만이 아니었다. 수술한 다리는 하지 않은 다리에 비해 눈에 띄게 근육이 없이 나뭇가지처럼 뻣뻣하기 그지없어 근육도 지방도 붙지 못한 모양을 하고 있고, 다리 양쪽의 길이도 굵기도 다른 탓인지 뒤틀린 골반과 허리에 항상 통증이 있었다. 동생은 그런 통증이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옛날 솜이불처럼 자신의 몸을 온전히 덮어 짓누를 때마다 학교를 빠져야만 했다. 수술을 해야 할 때는 한 학기를 그저 병원에서 보내듯 살아야 했다. 그래서 학원을 다닐 수도 제대로 된 수업을 듣기도 어려웠기에 성적은 항상 전교 꼴등에 가까웠다. 동생은 자기 자신이 공부를 싫어해서 그렇다며 웃어넘겼지만, 엄마와 나는 웃을 수 없었다. 그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내던진 채 살아가고 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에 태어났으면 동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엄마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하셨다. 우리 아빠라는 사람은 이혼 후에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양육비나 동생의 수술비, 하다못해 치료비 정도도 지원해 준 적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엄마는 오로지 본인이 홀로 벌어 동생의 수많은 수술비와 입원비, 치료비를 마련해야 했다. 동생은 6등급 장애인이라는 어중간한 낙인으로 인해, 어중간한 지원만을 받을 수 있었고 지칠 대로 지친 엄마의 어깨에 얹어진 짐들을 덜어주진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엄마의 빚이 되고, 어린 언니였던 내가 조금 더 빨리 성숙해져야만 했다.

우리는 비교적 가난한 동네에서 살았다. 치안도 인프라도 좋은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이런 동네일수록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더욱 심각하다. 동생은 정말 심각하게 괴롭힘을 당하고 살았었다. 급식 한 번 제대로 먹기가 힘들 정도였단다. 하지만 매일 새벽에 출근해서 밤에 쓰러지듯 집으로 오는 엄마에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기엔 동생도 어중간히 철이 들었던지, 결국은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도 없는 언니인 나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자신이 지금까지 어떤 괴롭힘과 고통을 받았는지를.

나는 동생이 잠든 후에도 잠을 설쳤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엄마에게 이 일을 말할 수 없기에, 나는 동생의 자는 손을 꼭 잡고 곁에 누워 색색 숨 쉬는 동생의 숨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내가 엄마 대리가 되어야만 해. 동생의 부족한 면을 내가 채워주자. 동생이 마음껏 어리광을 부릴 장소가 되자. 13살의 다짐이었다.

그 뒤로 나는 모든 일을 내 선에서 해결하려 애썼다. 엄마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동생이 덜 힘들게. 동생이 작은 지느러미로 동등하게 헤엄칠 기회라도 얻을 수 있게. 동생의 담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나는 이미 수없는 시행착오를 겪은 후였다. 그리고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다. 그냥 "제 동생이 반에서 괴롭힘을 당해요.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미적지근한 반응이 나오고 동생의 일상도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것 같아요. 이 이상 일이 커지면 정말 신고해야 할 거 같아서 미리 말씀드려요."라고 말하면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라도 한다.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이라는 말을 꼭 넣어야 심각성을 받아들인다. 미디어에서도 학교에서도 ‘장애인을 괴롭히지 마세요, 장애인을 도와주세요.’라는 말을 가르치고 보여준다. 이 담임 선생님도 벌써 몇 년을 외치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것에 심각성을 느끼나 보다. 교육직에 있는 사람도 이렇게 말해줘야 다시 한번 생각하곤 하는 세상에서 사회를 상대로는 얼마나 큰소리를 질러야 한 번이라도 쳐다봐줄지.

어느덧, 동생은 성인이 되었고 보건행정학과를 다니며 간호조무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때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맞서야 할 벽이 너무나도 많은 것을 피부로 느낀 동생은 또래보다 작은 손에 쥐고 있던 희망마저 놓아버리고 말았었다. 동생은 말했다. "내가 잘못하면 사람들은 장애인에 대한 선입견을 가져버려. 내가 잘하지 않으면 안 돼. 하지만 나는 잘 할 자신이 없어.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우울해하는 동생을 위해 나는 여러 가지 기사와 영상, 강연들을 찾았다. 그리고 큰 성공을 바라는 게 아니라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장애인이라고 뒤에 서지 않고 나란히 서기 위한 노력을 선보이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여줬다. 나는 동생의 눈에 약간의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차별을 하려 드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이야. 그 사람의 속이 좁은 건데 왜 네가 더 열심히 해야 할까? 너는 너만큼만 해. 그럼 어느새 다들 너를 인정할 거야. 너는 손이 야무지니까 뭐든 할 수 있을 거야." 이 말을 끝으로 동생은 조금씩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있다. 공부를 하면서도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곤 한다.

모든 사람이 똑같다.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량만큼의 일을 해내면 된다. 장애인이라고 사회의 시선에 맞서 잘 보이려고 몸을 갈 필요도 없다. 결국 자신만큼의 일을 해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곁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그들과 함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 있을 수 있고 어떤 직업이든 할 수 있다. 비장애인인 우리는 그저 그들을 틀에 가두어 한 쪽으로 몰아 외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원래 우리 곁에서 함께 지내는 이웃임을 인식하고 그 사람만큼의 노력만 하면 될 수 있게 하는 것. 그들도 우리와 함께 똑같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손을 맞잡는 것만 하면 되겠다.

나는 니모의 짧은 지느러미 대신이 되어 동생을 빨리 헤엄칠 수 있게, 남들과 똑같이 보이도록 해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조금 짧은 생각이었다고, 짧은 지느러미인 동생의 곁에서 같이 천천히 헤엄쳐주면 된다고, 같이 바위도 비켜 지나가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가 그로써, 짧은 지느러미의 니모로서도 행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결국 우리 사회가 해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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