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7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86편 접수됐다. 이중 김효진씨의 ‘성준이가 왜 그럴까?’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19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19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아홉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박신영씨의 ‘아무래도, 난 괜찮아’이다.

아무래도, 난 괜찮아

박신영

새벽 3시에 시작된 진통은 아침 9시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출산의 고통을 그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더욱이 남자인 내가 그 고통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시간이 더 지나자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첫아이가 태어났다. 온몸에 묻은 피, 꽉 움켜진 손가락과 발가락, 두 눈은 질끈 감아 미간 잔뜩 주름진 찡그린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둘째 녀석까지 만나게 되었다. 자연분만의 스릴 대신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만난 과정도 제법 색달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했고, 3년의 간격을 두고 맞이한 두 아이가 태어난 순간, 아빠로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보다 더 기뻤던 찰나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마냥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미안했다. 죄스러웠다. 마음속에 꺼지지 않은 불안감은 아무리 지우려고 해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혹여 나로 인해 내 아이들의 시력에 어떤 문제라도 생기지는 않을까, 오랫동안 걱정하고 또 염려했다. 다행이라면 두 아이 모두 시력에는 그 어떤 문제도 없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말이다.

선천성 녹내장.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병명을 처음 마주한 것은 내 나이는 고작 열두 살. 그동안 품어온 궁금증이 해결됨과 함께 치료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각막의 크기가 달라 두 눈의 크기가 눈에 띌 정도로 차이가 났다. ‘왕눈이’와 ‘짝눈’이란 별명은 필연적이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대했다. 그 당시 그런 별명 하나 없는 친구는 없었으니까. 다만 억울했다면 체육시간에 공놀이를 못 했던 것. 시야가 좁으니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공을 알아차리는 건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주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가끔씩 친구들의 놀림거리가 될 때면 온몸이 땀으로 젖을 만큼 정말 힘들었다. 묵묵히 버텨온 정신력도 그럴 때는 송두리째 흔들렸다.

가끔 혼자 있을 땐 이런 행동도 했다. 왼쪽 눈만 손으로 가리고 오른쪽 눈을 떴다. 그렇게 여러 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오른쪽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그리고 모든 사람들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나처럼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거라고 억지로 믿고 싶었다. 병명에 대한 정확한 원인도 몰랐고, 굳이 그 이유를 찾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오른쪽 눈에 시력이 전혀 없었다.

별 뜻 없이 써 내려간 일기장을 보신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어느 날 특별한 체육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2인 1조로 짝을 이뤄 한 명은 눈을 가리고 다른 한 명은 눈 가린 친구가 다치지 않게 도와주는 역할 놀이를 했다. 교실로 돌아와 나를 앞으로 불러내셔서 친구들에게 이렇게 소개해 주셨다. 세상을 반 밖에 볼 수 없지만, 그만큼 두 배 더 깊게 볼 수 있는 눈이라고... 나를 격려해 주셨고 친구들에게 내 눈에 대해 쉽게 들려주셨던 것이다. 이후 졸업 때까지 그 누구도 나를 별명으로 부르지 않았다. 동시에 세상을 반만 볼 수 있는 내 한계에 대한 외부의 간섭은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갑옷이라도 입은 듯 자신감의 뿌리는 영혼 깊게 뻗어 내려갔다. 그 덕분일까. 한 눈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는 흔히 말하는 ‘장애’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다.

군 면제를 받은 뒤 입대하는 친구를 위해 논산과 의정부, 춘천으로 향했다. 백일 휴가 나오면 술 사주고, 편지도 자주 써줬다. 한창 유행하던 매직 아이, 3D 영화도 누릴 수 없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탁구와 야구처럼 작은 공의 스포츠는 무척 어려웠지만, 농구나 볼링은 남부럽지 않게 즐겼다. 전공 수업으로 커다란 스케치북에 수직선과 수평선을 자주 그려야 했고, 그때마다 오른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었지만 PC를 이용해서는 정확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때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말씀이 다시 한번 내 삶을 파고드는 순간을 마주했다. 취미로 시작한 DSLR 카메라. 5년 넘도록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만을 담았다. 촬영하는 순간, 사진으로 바라볼 때마다 나는 마치 하늘을 날아다니는 느낌에 빠지곤 했었다. 우연한 기회에 사진학과 교수에게 구름 사진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대화가 길어지면서 내 이야기까지 전하게 되었다.

그러자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눈으로 세상을 보지만, 카메라는 오직 한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는 구조다. 그러기에 내 눈은 카메라의 그것과 같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그대로 사진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눈을 뜰 때부터 감을 때까지 내가 바라보는 시선이 카메라와 같다는 생각은 일절 해 본 적이 없었다. 취미로 즐겼기 때문에 큰 욕심도 없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이 기록하고 보존하는 카메라와 같다고 생각을 하자 묘한 즐거움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실렸고, 뷰 파인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설렘이 일어났다. 소소한 일상부터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까지 카메라에 담을 때면 언제나 그 일렁거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근심 없이 좋은 날만 이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근래 들어 오른쪽 눈에 말썽이 많아진다. 둘째 아이가 두 살 때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동화책 모서리에 각막이 찢어졌다. 응급실을 두 번 달려갔으나 후속 치료를 서둘러 받아 큰 고비는 넘겼다. 2년 전엔 백내장이 발병했다. 녹내장이 시작된 안구에는 백내장도 뒤따른다고 하니 크게 염려할 일은 아니다. 더불어 흰자 전체가 새빨갛게 충혈이 되고는 사라질 기미가 없다. 몇몇 안과에서 진료를 받았으나 안구로서 수명을 다한 상황이라 개선의 방법은 없다고 했다. 조금만 몸이 피곤하면 눈이 시큼 거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인공눈물을 수시로 넣고, 외출할 땐 선글라스를 꼭 챙긴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삶의 한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삼고 싶지 않다. 주어진 것들과 남은 것들을 굳이 헤아리고 싶지도 않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단 한 번도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불편함이 전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제는 그 불편함마저 내 것이 되었고 일부가 되었다. 언제나 그 불편함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조금 돌아가거나 쉬었다 가는 마음으로,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될 일이다. 두 아이의 아빠로 살아가게 되면서 한쪽 눈에 시력이 없는 장애는 점점 더 내게 장애로 인식되지 않고 있다. ‘보통’의 사람에 비해 한쪽 눈만 있다는 사실. 아주 가끔 밀려오는 불안감.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눈 건강에 더 최선을 다한다.

이런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사랑해 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아내와 더불어 좋은 아빠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두 아이에게도 늘 고맙다. 비록 반쪽 눈이지만, 더 오래 들여다보고 더 깊게 바라볼 것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