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열네번째는 가작 수상작인 문명숙 씨의 ‘접시에 꿈을 담다’다.

접시에 꿈을 담다

문명숙

힘든 날들이었다.

이혼과 더불어 아이 넷을 키우며 아등바등 살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지옥과 같았던 결혼생활에서 해방됐다는 것에 만족하고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난 나이 오십이 되었고, 아이들은 엄마에게 부담이 될까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그렇게 모두 대학을 졸업했다. 참 감사했다. 미안함과 대견한 마음속에 안도감이 들었다. 이젠 더 이상 엄마의 보살핌이 필요하지 않겠구나… 지치고 고단했나 보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근 28년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렸으니까.

이제는 내 삶을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 똑같이 식당에서 요리를 하는 아르바이트였음에도 활력이 생기고 일하는 게 너무 즐거웠다. 내가 만든 요리에 만족하는 손님들을 보면서 나름 꿈도 생겼다. 나도 언젠간 작은 가게의 사장이 되고 싶다는. 하여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사장의 인정을 받아 그저 아르바이트생에서 매니저로 직급과 연봉도 올라갔다. 노력만 하면 안 되는 일은 없다는 일념으로 몸이 상하는 지도 모르고 남들보다 두 배, 세 배로 일을 했다. 어느 날부턴가 손목에 작은 무언가가 잡히고, 조금씩 통증이 생겼지만 ‘난 남들보다 회복력이 빠르다’는 자기 위로로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병원에서 의사는 엑스레이론 나오는 게 없으니 걱정이 되면 MRI를 찍어보자고 했지만, 매니저 일을 나가야 했기에 당분간 깁스를 하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미련하게도.

점점 붓기가 커지고 심지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심각성을 깨닫고 손에서 일을 놨다. 결과는 처참했다. 그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한 달 사이에 “점액 섬유육종”이라니.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암이었다. 담당 의사마저도 학교 교과서에서나 보던 암이라 했다.

서울 암센터에 입원하여 암세포가 손목에서 팔꿈치를 지나 팔뚝까지 전이되어 있다는 걸 확인했다. 그렇게 제왕절개 수술도, 맹장 수술도 해본 적 없던 난 태어나 처음으로 수술대에 올라가 팔꿈치 위까지의 왼팔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당시에는 장애인이 되는 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점점 암세포가 퍼져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도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하여 고민도 하지 않고 절단 수술에 동의를 했다. 당장 내 몸에 암세포만 없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으니까.

퇴원 수속을 밟고 의수를 맞추고, 장애인 협회에 방문해 장애인 등록을 했다. 환상통 때문에 약을 먹어도 짜증나게 아파 하루 종일 우울했고, 밤에도 몇 번을 자다 깨 약을 털어먹었다. 그래도 아프다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었다. 뭔가라도 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평소에 하던 청소, 빨래, 설거지 등 집안일을 해보려던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장애인이 되었다는 걸 실감했다. 한쪽 팔만으로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환상통보다 무섭고 아팠다.

외출도 하지 않고 한동안 멍하니 있거나 목 놓아 울거나 하기를 여러 날...

창가에 새가 날아들어 지저귀는 소리에도, 창밖에서 길고양이가 우는 소리에도 눈물이 났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 사회에 나가 뜻을 펼치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짐덩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에...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모두 출근하고 텅 빈 집에 앉아 이런 생각이 들었다. 회사 일로도 힘들 아이들인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다고. 내가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내 아이들이 더 힘들어진다고. 하여 그날부터 하나하나 천천히 집안일을 하기 시작했다. 산더미만큼의 쌓인 설거지를 제외하곤 아이들에게 맡기지 않고 혼자서 다하려 애썼다. 그 와중에 느꼈다. 나, 정신력 하난 끝내주는구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정말 하지 못할 일은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이 즐거워졌다. 내 표정이 밝아지니 우리 집에도 웃음이 찾아 들었다. 아이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일하느라 공원도 가본 적 없었는데 시간이 나는 대로 애들이랑 동네 곳곳을 다녔다. 어느 날은 큰 딸이랑, 어느 날을 셋째랑, 어느 날은 애들이랑 다 같이!

그러던 중, 학교를 졸업하고 카페에서 일하며 창업을 준비하던 딸이 카페에서 브런치를 만들어 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을 해왔다. 딸의 부탁에 조금 놀랐지만, 두렵진 않았다. 요리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으니까. 단지 한쪽 팔로만 해내야 한다는 게 조금 걱정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설레고 기대된다.

장애 판정을 받은 지 벌써 2년의 세월이 흘렀다.

병원에 정기검진을 가면 의사선생님이 묻는다. 팔 전단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후회하진 않는다. 난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단지 후회되는 게 있다면 좀 더 일찍 적극적으로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애들 대학 다 졸업시키고 이제야 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렇게 되다니 정말 지지리도 복도 없다고. 어쩜 인생이 그렇게 기구하냐고.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다. 그러나 정말 지지리도 복이 없는 인생은, 기구한 인생은 내가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갇혀 사는 것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난 내게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고 남은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살련다. 그리고 난 다시 한 번 꿈을 꾼다. 내가 만든 음식이 담긴 접시가 여러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기를, 혹자에겐 내 요리가 꿈과 희망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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