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알복지재단이 최근 ‘제6회 일상속의 장애인-스토리텔링 공모전’을 진행했다.

이번 공모전은 장애와 관련된 일상 속의 모든 이야기를 주제로 장애인 당사자, 부모, 주변인들의 다양한 사연들이 총 427편 접수됐다. 이중 최유리씨의 ‘우리 집에 DJ가 산다’가 보건복지부 장관상의 영예를 안았으며, 총 20편이 수상했다.

에이블뉴스는 총 20회에 걸쳐 공모전 수상작을 연재한다. 여섯 번째는 우수상 수상작인 김채린 씨의 ‘시절과 기억’이다.

시절과 기억

김채린

어릴 적부터 유독 낯을 많이 가렸던 내게, 오빠는 큰아버지 댁으로 가는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 유일한 이유였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가 어른들은 모두 큰아버지 댁으로 모였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전을 부치거나 음식을 나르며 분주히 움직이는 엄마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기 바빴다. 이름도, 나와 몇 촌인지도 모르는 어른들 사이에서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시간 때우기 놀이였다.

“채린아, 우리 카드게임 할까?”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혼자 앉아 제 엄마 뒷모습만 하릴없이 쳐다보고 있는 게 마음이 쓰였는지 오빠는 항상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아니 오빠 오늘은 카드게임 말고 놀이터 가서 놀고 싶어, 구름다리..”

“그래, 그럼 놀이터 가서 두 시간만 놀다 올까? 저녁 먹기 전까지”

혼자 앉아있는 내게 언제나 먼저 말을 걸어주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고 내가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사주는 오빠는 슈퍼맨, 예스맨이었고 놀이터에선 정글의 타잔이었고 책을 읽을 땐 선생님 되어주었다. 문장 몇 개로 장황하게 그의 존재를 표현하기 보단 한 단어로 오빠를 나타내보자면 그는 큰아버지의 아들, 즉 나와는 4촌 관계인 지훈오빠였다. 오빠는 어릴 때 뇌수막염에 걸려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오른쪽 눈은 거의 실명 상태였으며 신경이 손상되어 손을 자주 떨었다. 장애에 무지했던 나는 오빠가 구름다리를 건너는 내 손을 잡아줄 때 왜 손을 떠는지, 왜 항상 한쪽 눈을 찡그리는지, 다른 사람들처럼 빨리 달리지 못하는지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지훈오빠, 그런데 오빠는 왜 이렇게 손을 떨어?”

베란다 문을 닫는 오빠에게 내가 던진 질문이었다. 오빠는 짐짓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베란다 문이 무거워서 그랬다는 답을 건네주었다. 그 이후에도 나는 오빠의 외모나 행동에 의문이 들 때마다 질문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가지각색의 대답을 들려주었는데, 그것들은 어린 시절 나의 의문들을 깨끗이 해결해 주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키가 자라고 머리가 커질수록 내 질문에 대답하는 오빠의 모습에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오빠가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빠와 엄마, 나, 그리고 지훈오빠가 성묘를 가기 위해 차를 타고 할머니 묘가 위치한 시골로 내려가던 중 오빠는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다. 평화롭게 달리던 차 안에 오빠의 신음소리와 무거운 공기가 가득 차올랐다. 나는 너무도 무서워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이 시간이 어서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운전을 하던 아빠가 갓길에 차를 세우고 오빠를 진정시킴으로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그것은 내 기억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가 이따금씩 떠올라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더 이상 오빠를 예전처럼 대할 자신이 없었고 데면데면한 사이가 지속되다가 1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큰집에서 큰아버지 내외와 지훈오빠와 함께 살다가 요양병원으로 옮겨지신 뒤 98세의 나이로 눈을 감으셨다. 거의 백 살에 다다르게 살았던 것 때문인지 조문객들은 할아버지의 죽음을 호상이라며 위로했다. 가족 모두가 슬픔을 누르고 마음을 추스르는데 눈에 띄게 한 명만이 그것에 실패한 듯 보였다. 지훈오빠였다. 오빠는 할아버지의 영정사진 곁을 떠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조문객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한 와중에도 오빠는 쉽사리 일어나지 못했지만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다.

7일 간의 장례를 마치고, 여러 가지 것들을 정리하기 위해 우리 가족은 큰집으로 향하였다. 그곳에서 나는 큰엄마와 엄마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예기치 않게 어린 시절의 지훈오빠와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 지훈이 어릴 때야, 너무 이쁘지 않아?”

“어머, 이거 지훈이에요? 형님, 너무 예뻐요~”

궁금증이 생긴 나는 슬쩍 엄마 옆으로 다가가 큰엄마가 가져온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았다. 빛바랜 사진 속에는 조금은 뾰로통해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가 서있었다. 지훈오빠는 사진 속에서 눈을 찡그리거나 등이 굽어있지 않은 채로 아주 똑바로 서있었다. 오빠가 어릴 적 뇌수막염을 앓았다는 것, 그 후유증으로 신경이 손상되어 지금껏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른 삶을 살아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제 몫을 다 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대견스럽고 고마운지 모른다며 큰엄마는 감정을 토로하듯 내뱉으셨다.

지금껏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아무에게도 묻지 않았던, 오빠가 장애를 겪게 된 계기에 대해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 사실 오빠가 발작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는 오빠의 장애를 지나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오빠가 손을 떠는 것, 눈을 찡그리는 것, 오빠의 행동, 말투 모든 것들이 발작의 전조증상으로 느껴졌고, 오빠와 함께했던 즐거운 시간들은 뒤편으로 밀려나버리고 할머니 성묘를 가던 차 안의 장면만이 머릿속에서 마치 사진을 찍은 듯 선명하게 떠다녔다.

“우리 지훈이가 어렸을 때부터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했어. 그래서 아버님 장례 때도 그렇게 울었나봐, 평소에 제 할아버지를 엄청 따르고 좋아했거든”

사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거동이 불편해지셨고 그때부터 오빠는 마다하지 않고 할아버지를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 순간 가슴이 저릿해져 오면서 어떤 순간이 다시 떠올랐는데, 그것은 아마 오빠가 나와 놀아주던 행복했던 순간이었으리라. 오빠는 어린 시절부터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사람을 좋아했고, 누군가가 도움이 필요할 때면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언제나 그 모습대로 그 곳에 존재했을 뿐이었다. 오빠가 장애를 가졌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예전에 내가 알던 오빠와 지금의 오빠가 다른 사람이 아니며,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던, 그건 그냥 오빠의 일상일 뿐이라는 것을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나는 그에게 이런 미안함을 덜 느껴도 되었을까? 오빠는 내가 어떤 태도를 보이던 항상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나치게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로 항상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었다.

성인이 된 지금 나는 큰집에 가면 더 이상 엄마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지 않으며 어른들의 질문 세례에도 당황하지 않는 능청스러운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친척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은 무료하게 시간을 때운다. 그러나 이 무료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데, 이런 나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 또 한 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빠, 심심해 보인다, 나가서 배드민턴이나 할래?”

나의 제안에 오빠는 언제나 씩 웃으며 대답한다.

“응, 근데 두 시간을 넘기면 안 돼, 저녁 먹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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