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 . .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는 유치환의 ‘행복’이다. 이 시에서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고 한다. 먼저 사랑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화자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했다.

언제부터인가 편지를 써서 부치고 받고 하는 일이 사라진지 오래지만, 화자는 우체국에 와서 편지를 부치는 사람들도 사랑받기보다는 사랑을 주는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복심 씨. ⓒ이복남

이 시의 처음과 끝에서는 반복적으로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과 행복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도 행복이 시집속의 시어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게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있을까.

이복심 씨는 사춘기 때 유치환의 ‘행복’을 처음 접하고 즐겨 읊조렸다고 했다. 그때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행복’은 그냥 아름다운 시어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눈을 감고 나서야 진정한 행복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저는 요즘이 너무 너무 행복하고 평화로워요.”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 다를 수도 있으므로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기준이 다 다른 것이므로.

이복심(1967년생) 씨는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천장리에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시는 부모님 슬하에서 8남매의 여섯째인데 2남 6녀로 언니들이 많았다.

“어머니가 딸만 주르르 여섯을 낳아서, 외할머니는 또 딸을 낳았다고 저를 엎어 놓으셨다는데 안 죽고 여태 살아 있습니다.”

그는 딸 부잣집의 여섯째였다. 가난한 시골살림의 천덕꾸러기였겠지만 어머니는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고, 가끔 외할머니가 엄마 등골 빼 먹는다고 구박하시곤 했다.

무안군 동쪽은 영산강을 건너 나주시와 영암군, 남쪽은 목포시, 북쪽은 함평군과 접하고, 서쪽은 신안군의 섬들과 마주한다. 고향 해제면 천장리는 신안군에 인접한 바닷가인데도 그의 고향은 어촌하고는 거리가 먼 농촌이었다.

“우리 마을은 바닷가하고는 좀 떨어져 있어서 바다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의 고향은 바닷가 근처임에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바다는 구경도 못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 마당에 뿌릴 모래를 가지러 바닷가에 가곤 했는데 그때 바다를 처음 보았습니다.”

날마다 논과 밭 그리고 산과 나무만 보다가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 어마어마한 물이었다.

“저 바다 건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나 어렸을 때 막연한 생각이었고 그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중에 도시로 간 언니들에게서 바다 건너 저편 도시 이야기를 들었고 나도 나이가 들면 도시로 가야지 생각했습니다.”

부모님은 봄이면 씨 뿌리고 여름이면 농사를 지어 가을이면 수확을 했다. 힘든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고, 여름에는 땀 흘려 일하지만 가을걷이를 하고나면 아버지는 노름방을 드나들었다.

“언니들도 엄마 아빠를 거들어서 농사를 지었는데, 언니들은 초등학교 졸업하고는 차례로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무안에서 광주나 목포, 서울도 아니고 왜 언니들이 부산으로 갔을까.

“이렇게 원장님을 만나려고요.(웃음) 그건 농담이고 고모와 삼촌이 부산에 살았어요.”

그렇게 언니들은 차례로 집을 떠나고 그만 동생들과 남아서 부모님을 도왔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깔(꼴)도 베고 고구마도 캐고 했습니다.”

고향에서는 ‘소꼴’을 ‘깔’이라고 했단다. 집에서 고개 두 개를 넘어야 그의 논밭이 있었는데 부모님은 매일 그 고개를 넘나들었다.

등산길에서. ⓒ이복심

“아빠가 겨울이면 할 일이 없으니까 노름방에 드나들었는데, 나중에는 논밭도 다 날려먹었습니다. 그때가 언젠지 잘 모르겠지만 도시락은 언제나 꽁보리밥에 김치나 고추 장아찌가 전부였습니다.”

점심시간에도 친구들 앞에서 도시락 뚜껑을 못 열었다.

“다른 친구들은 저 같은 도시락을 사오지는 않았기에 잘 사는 아이들의 흰쌀밥에 계란말이나 멸치 같은 도시락이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말도 못했고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노름에 미쳐 있었다.

“나이 많으신 남자 담임이 아버지 같았는데, 노름만 하는 아버지 보다 선생님이 더 좋았습니다.”

요즘은 겨울이라도 별로 추운 줄 모르고 사는데, 그 무렵 겨울은 정말 추웠다고 했다.

“그때는 입을 옷이 없어서 그랬는지 겨울은 정말 추워서 오들오들 떨었던 기억 밖에 없습니다.”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이를테면 장래 희망이라든가.

“장래희망 그런 거 없었습니다. 하루하루 살기도 바빴습니다.”

학교에서는 무엇을 잘하고 좋아했을까.

“공부는 별로였고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풍금도 좀 치고, 피리도 좀 불고, 그때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하는 초록바다를 잘 불렀다.

“면소재지에 있는 해제국민학교를 다녔고, 해제중학교를 갔는데 그때 나온 노래가 혜은이의 ‘후회’였습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혜은이의 노래를 중얼거렸다. ‘강가에 서서 정다웠던 그 날을 생각해봤어~’ 딱히 정다웠던 그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단지 노래가 좋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한때 생각은 해 보았지만, 나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짠했지만 포기했습니다.”

혹시나 가수가 될 수 있을까 생각은 해 봤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어불성설인 것 같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