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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소원

지체장애 강신주 씨의 삶 - ①

에이블뉴스, 기사작성일 : 2020-03-23 14:51:44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는 심순덕 시인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이다. 심순덕 시인은 1960년 강원도 평창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지만 31세에 어머니를 여읜 후 그 아픔에 사무쳐 쓴 시가 바로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였다고 한다.

강신주 씨.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강신주 씨. ⓒ이복남
엄마라는 호칭은 부모와 자식이라는 피붙이의 관계다. 거기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누구라도 엄마라는 이름은 가슴 한편을 시큰하게 하는 아픔과 동시에 포근함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식은 아무리 어른이 되어도 ‘영원한 내 새끼’에 불과하다.

그러나 내가 엄마·아빠가 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사람이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비로소 내가 엄마·아빠가 되고 나서야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인 줄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강신주 씨에게 엄마는 임종도 지키지 못한 불효자였다.

강신주(1963년생) 씨는 지리산 자락 경상남도 산청군 모례마을에서 7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골생활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제때만 해도 보릿고개가 있었고, 그 시절을 참 힘들게 넘어 왔습니다.”

요즘 강신주씨는 가정용의료기제품을 체험을 통해 판매하는 일을 하고 있다.

“어머니들이 허리가 꼬부라지지요? 왜 그런지 아세요? 나이가 들면서 칼슘이 부족해서인데 어머니들이 허리 한 번 못 펴고 쪽잠을 잤기 때문입니다.”

그의 어머니도 가난한 산골생활에서 7남매를 키우느라 허리 한 번 제대로 못 펴고 등골이 시리도록 쪽잠을 잤을 거라고 그가 어른이 되어서야 어머니를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큰 부잣집이 아니라면 아이들과 한방에서 자게 마련인데, 아랫목은 아이들에게 내주고 어머니는 문가에서 등을 문 쪽에 두고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쪽잠을 자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나이가 들면 등이 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적령기가 되어 율현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학교는 마을 안에 있어서 학교에 갔다 오면 형들과 함께 부모님을 도와서 농사를 지었다.

“어렸을 때는 꼴도 베고 보리이삭도 줍고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때는 나중에 커서 무엇이 되고 싶었을까?

“그런 것은 잘 모르겠고,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그래서 운동회 때는 항상 1등을 했습니다.”

세상에나, 운동선수가 꿈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달리기를 잘했다니……. 물론 지금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지체장애인이다.

아내와 백두산 도보 등반.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아내와 백두산 도보 등반. ⓒ이복남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읍내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가난한 시골 살림에 부모님은 어떻게 7남매를 키우고 공부를 시켰을까.

“그래서 큰형은 기술고등학교로 가고, 누나들은 중학교만 졸업했고, 어머니는 저와 여동생만 대학을 보냈습니다.”

누나들은 중학교만 졸업했다면 남녀 차별이 너무 심한 것 아니었을까.

“그때는 차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고, 어머니의 생각에 누나들도 수긍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골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그리고 대학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주경야독으로 마산에서 야간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입교일이 그해 후반기로 결정되어 입교 일을 기다리는 기간 동안 마산에 있는 **회사를 다녔는데 거기서 손필자(1969년생) 씨를 만났습니다.”

손필자 씨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생기발랄하고 착한 아가씨였다.

“회사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막내라서 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입영 날짜가 되어 영천 3사관학교 학사장교 12기로 입교했다. 3사관학교를 마치고 철원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다.

군대 갔을 동안 아가씨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지는 않았을까.

“아, 그 아가씨하고 그런 사이는 아니었고, 그리고 그 아가씨는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라도 생겼다는 것일까.

“군 생활을 계속하려는 계획을 아시고 부대에서 제 상사가 친척 아가씨 A 씨를 소개해 줬습니다.”

처음에는 몇 번 편지로 왕래를 하다가 나중에 만나면서 A 씨와 가까워졌다.

“A 씨도 제가 좋다 해서 장래를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A 씨가 파혼을 선언하면서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장기근무를 포기하고 제대를 전후해서 A 씨를 찾아가 수없이 설득해 보았습니다.”

A 씨가 그와 헤어져야만 했던 이유는 사주 때문이었다. A 씨 집안에서 어느 점쟁이에게 사주를 봤는데 그와 결혼하면 누군가가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것이었다.

썬바이오 사직지점에서 강의.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썬바이오 사직지점에서 강의. ⓒ이복남
“지금은 담담하게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그때는 정말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져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결국 A 씨와의 결혼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몇 개월간의 가슴앓이와 긴긴 시련을 겪어야 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 방황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선원 모집 광고지를 보고 그날 바로 출항하는 어선에 승선했다. 쌍끌이 어선이었는데, 망망대해에서 팔자에도 없는 뱃사람이 되어 있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어느덧 세월이 흘러 6개월쯤 지나 출항했던 배가 부산항에 복귀하게 되어 가족들에게 연락하니 짐작은 했지만, 가족들의 걱정과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6개월 동안 행방불명이 되자 부모님은 물론이고 형이나 누나들은 난리가 났었답니다.”

긴긴 자숙의 시간을 보낸 후, 울산의 친척이 경영하는 회사에 근무를 하면서 점차 안정을 찾게 되었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다소 생소한 엔지니어로서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어느덧 나이가 30을 훌쩍 넘기게 되니 집에서도 결혼을 빨리하라고 성화였다.

“결혼은 뭐 혼자서 합니까? 열심히 생활하다 보면 제 짝이 나오겠죠. 지금은 생각이 없어요.”

형님은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 주시며 전화해서 싹싹 빌고 결혼하자고 하면 아마도 받아 줄 거라고 했다.

“저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어머니와 형님이 지금의 아내와 연락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다른 여자에 미쳐있는 동안 상처만 주었을 뿐인데…….

“어머니와 큰형은 손필자 씨를 찾아가서 무릎 꿇고 빌라고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연락을 했는데 고맙게도 그동안 어머니와 형님이 뭐라고 설득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색하고 쑥스럽고 미안한 재회는 태종대에서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사주팔자를 믿지 않지만, A 씨와 헤어지게 된 것은 손필자 씨를 다시 만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안했다.

“부랴부랴 결혼 날을 받아 놓고 예복을 맞추기 위해서 부산으로 가려고 공장 문을 나서는데 갑자기 왼쪽 엄지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결혼할 그 사람을 울산으로 불러서 함께 병원을 갔는데 자신도 잘 모르게 손목 인대가 절단되었다고 했다.

“그다음 날 수술을 받고 깁스를 했습니다.”

백두산에서 아이들과.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백두산에서 아이들과. ⓒ이복남
결혼 날을 받아 놓고 손목 깁스를 하다니, 그것도 3주씩이나.

“깁스를 풀고 다음 날 결혼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식을 하고 울산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아내는 울산 생활이 처음이라 아는 사람이라고는 나밖에 몰랐는데 회사 일이 바빠서 깨소금 같은 신혼생활은커녕 같이 있었던 시간이라고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해 봄 아내의 임신 소식에 대한 기쁨도 잠시 아버지께서 쓰러지셨고, 아버지는 신장암 진단을 받았다.

“아내와 저는 번갈아 가며 아버지 병간호에 회사 일에 몸도 마음도 극도로 지쳐있었습니다.”

당시 그는 울산 **엔지니어링 공장에서 품질관리 계장으로 근무를 했는데 배수 파이프 안에 특수코팅을 하는 회사였다.

“그날도 출하할 완제품을 확인하고 차에서 뛰어 내리면서 중심을 잃어 대퇴부 고관절 골절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그는 고관절 골절로 전신 깁스를 했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내는 입덧이 심해 혼자 몸도 힘들었지만 남편 뒷바라지에 살이 쏙 빠져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한여름에 전신 깁스를 하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안 해본 사람은 그 심정 모를 거라고 했다.

“저는 전신 깁스를 하고 꼼짝도 못 하고 누워서 대소변에 식사까지도 아내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길고 지루한 여름이었다.

“그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다시는 다치지 말자, 병원에 오지 말자, 다짐 또 다짐을 했습니다.”

드디어 여름도 지나가고 가을도 지나가고 깁스를 풀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퇴원하는 날 아내는 첫아이를 낳았다.

“퇴원 후 물리치료를 열심히 받고 별다른 후유증 없이 한 달 후에 복직을 했습니다.”

그는 복직을 한 후 여느 때 보다 더 열심히 했다. 7개월간의 공백으로 회사직원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아이 아빠로서 책임감이 더 일벌레로 만들어 버렸다.

욕심이 화근이었을까?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다시는 다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이번에는 더 큰 대형사고가 터져버렸다.

“외국인 근로자들과 야간 업무를 하면서 크레인으로 대형 파이프 후렌지를 옮기던 중 크레인 체인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반사적으로 아래에 있던 다른 직원들은 밀어내면서 더 큰 사고는 막았으나 야속한 체인 덩어리는 저의 오른쪽 발목 부분을 사정없이 쓸고 지나갔습니다.”

오른발에서는 피가 펑펑 쏟아졌고, 의식은 희미해져 가는데 퇴근 시간이라 공단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은 너무나 멀고 힘든 시간이었다.

“처음 다쳤을 때 아내에게 미안해서 집에는 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지도자 건강 강의. ⓒ이복남 에이블포토로 보기 지도자 건강 강의. ⓒ이복남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아이를 업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아내를 보았다. 그러나 아내에 대한 미안함도 잠시 통증이 극에 달하면서 과다 출혈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뭐가 어떻게 됐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에 깨어났는데 새벽녘이었습니다.”

너무나 아파서 수술을 집도한 의사를 찾았다.

“수술을 했다는 것이 속된 말로 고깃덩어리를 그냥 꿰매 놓은 정도라서 당장 다른 병원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전문병원으로 이송하는 도중에도 과다 출혈 때문이었는지 의식이 왔다 갔다 하였다.

“새로 옮긴 **전문병원의 원장님은 상처는 심하지만 절단하지 않고 충분히 회복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매일 같이 드레싱 때나 회진 때마다 상태가 아주 좋다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도 그런 줄 알고 원장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째 되는 날 회진을 온 원장은 굉장히 당황하며 지금 당장 절단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사의 말만 믿고 안심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병신이 되는구나! 죄송, 그때는 장애인이라는 용어도 몰랐습니다. 절단수술만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절단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롭다는 말에 저와 아내는 수술 각서에 서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괴사가 시작된 상태라 수술이 늦어지면 생명도 위독해진다는 것이다.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그날따라 아이의 울음소리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태어난 지 4개월이 지난 아이였지만 아빠 다리를 절단하는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점심때가 지나 수술은 끝났고 오후 늦게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아내와 아이, 그리고 형님 누나들이 그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에게는 수술 소식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정신이 들고 보니 그제야 오른쪽 다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말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는 저를 많은 사람이 진심으로 격려해 주었지만, 그저 서글픈 생각만 들었습니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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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남 기자 (gktkr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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