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평창 읍내에 있는 고모집에서 평창중학교를 다녔다. 가끔 큰아버지가 오셔서 고모와 다투었다. 그의 유족연금 때문이었다.

“한 번은 고종형이 병용이 것 가지고 왜 두 분이 싸우느냐. 이건 병용이 다 주어야 한다고 대들기도 했습니다.”

회원들을 이끌고 가는 윤 대장. ⓒ이복남

그런 모습을 보니 더 학교에 다니기 싫어서 학교에 안 나갔다. 그러자 담임선생이 찾아와서 제발 학교를 다니라고 사정을 했다. 하는 수 없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창농고에 진학을 했다.

“요즘 같은 멘토 하나 없고 정말 공부가 하기 싫었습니다.”

결국 농고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로 갔다. 흑석동에 있는 삼강하드대리점에서 일을 했다.

“아이스케이크를 파는 것은 아니고 대리점에 배달을 하러 다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정말 원통했습니다.”

아버지가 근처 동작동에 있었는데 그 때는 찾아 볼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보훈청에 가서 그 사실을 확인하고 동작동 아버지 묘지에 가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아버지 시신도 없고 명패만 있지만.”

그 후로는 해마다 명절이 되면 아버지를 찾아 갔는데 정외숙 씨와 결혼 후에는 같이 간단다. 그리고 영월 무릉리에서 어머니 혼백을 모셔 와서 아버지와 합장을 했다.

레포츠클럽에서 장학금 전달. ⓒ이복남

삼강하드대리점에 있은 지 2년 쯤 되었을 때 강릉 보훈청에서 연락이 왔다. 평창에 있는 학교에 자리가 있으니 해 보겠느냐고. 평창 교육청에 가서 등록을 하고 도동국민학교로 갔다.

“학교의 심부름꾼인데 그 때는 소사라고 했습니다.”

평창읍내 교육청으로 문서를 가지고 왔다 갔다 하고 학교의 잡일을 도맡아 했다. 학교 숙직실에서 살았는데 밤이 되어 숙직실에 누워 있으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군에 가서 전사했다는데 나는 이게 무슨 꼴인가 싶어 홀로 울었다. 왠지 군에 간 아버지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1년 쯤 되었을까 군에 지원을 했습니다.”

주위에는 일가친척 하나 없었기에 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었다.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20사단으로 배치되었다. 처음에는 연천에 있다가 양평으로 이동했다. 아내는 어찌 만났을까.

“제가 하사였을 때 동생 면회 왔던 사병의 누나였습니다.”

그도 외로운 터라 28살에 A 씨와 결혼식도 없이 혼인신고만 하고 부대 근처에 방을 얻어 살림을 차렸다.

“아내와 애틋한 정은 없었지만 작전 나갔다 오면 아이가 하나씩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다섯이란다.

1980년 광주에서 5.18이 터졌다. 5.18진압을 위해 5월 20일 소정리역에서 광주로 향했다. 당시 그는 중사로서 분대를 이끌고 있었는데 작전 중에 눈을 조금 다쳤다. 위생병이 응급처치를 했음에도 눈은 계속 아팠고 나중에는 퉁퉁 붓기 시작했다.

전역패. ⓒ이복남

5월 25일 그는 양평 부대로 복귀했다. 의무대에서 치료를 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민간병원에도 다녔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사단 의무대에서 59후송병원으로 갔다. 59후송병원에 1달 쯤 입원했으나 군의관은 여기서는 안 될 것 같다고 했다.

서울에는 자리가 없다며 부산 통합병원으로 이송했다. 그것이 부산과의 첫 인연이었다. 부산 통합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염증이 생겨서 다시 또 수술을 하는 등 몇 번이나 수술을 했다. 1년 6개월 만에 오른쪽 눈을 들어내고 의안을 하고 제대를 했다.

“처음에는 녹내장은 질병이라며 유공자가 안 된다더군요.”

군에서 눈을 다쳐 의안을 했음에도 국가유공자가 안 된다니 억울했다. 국방부 육군본부 등에 진정을 해서 2년만에야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한쪽 눈만 의안이었고 다른 쪽 눈은 괜찮아서 시각장애 6급을 받았으나 왼쪽 눈도 점점 흐려져 등급은 자꾸 올라갔고 결국에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 1급이 되었다.

그가 부산 통합병원에 입원해 있을 무렵 아내 A 씨는 아이들과 부산으로 내려 왔다. 그가 시각장애인이 되어 군에서 재대하자 아내 A 씨와 헤어졌다. 아이들을 A 씨에게 맡겨 놓고 돈을 벌기 위해 공사판을 기웃거렸다. 국가유공자연금을 받았을 텐데 웬일일까.

“당시에는 유공자도 아니었고 나중에 연금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시각장애 6급이라 연금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공사판을 기웃거려 봐도 시각장애인이 된 그에게는 아무도 일을 시켜주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레포츠클럽 윤 대장. ⓒ이복남

여기저기 떠돌다가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설악산으로 갔다. 설악산 자살바위 앞에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마지막 잔을 비우면 자살바위 앞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알고 보니 키가 큰 미국인이었는데 꼼짝 할 수가 없었다.

“놔라고 소리소리 지르며 욕을 했는데 우리말을 좀 할 줄 아는 미국인이었습니다.”

미국인은 왜 죽으려고 하느냐 죽으려는 마음으로 살라고 했다. 나중에는 그 미국인과 같이 내려와 다시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미국인에게 신세한탄을 했다. 미국인은 그의 이야기를 듣더니 서투른 한국말로 “군인 정신은 다 어디 갔느냐”고 했다. 그래 군인 정신이었지. 다시 한 번 살아 보자 싶었다. 이왕 죽으려고 했던 몸을 산에서 누군가가 살려 줬으니 이제 나도 누군가를 위해서 살아보자 싶었다.

마침 인천에서 아는 지인이 목욕탕에서 보일러공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보일러공은 한쪽 눈으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목욕탕 보일러는 폐목 같은 것으로 직접 불을 땠다. 목욕탕에서 숙식을 하면서 보일러도 보고 때밀이도 하고 청소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 약간의 돈을 모아 부산으로 내려왔다. 부산에 와 보니 전처 A 씨는 중병에 걸려 있었고 아이들은 형편이 없었다. 그는 모아 온 돈으로 부곡동에 아파트를 하나 분양 받고 A 씨를 다시 호적에 올렸다. A 씨와 이혼했는데 왜 다시 합쳤을까.

“아내가 (A 씨) 수술을 앞두고 있었는데 돈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유공자였기에 아내는 보훈병원을 이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수술을 하고 난 A 씨는 그를 나 몰라라 했고 부곡동 그의 아파트에도 못 오게 했다. 그는 A 씨와 다시 헤어지고 부곡동 아파트를 내주었다. 여기 저기 떠돌며 보일러공으로 일하다가 수정동에서 마음 씨 좋은 노부부를 만나 적은 돈으로 이층 독채에서 오래 살게 되면서 돈도 좀 모았다. 그러자 여기저기 떠돌던 아이들도 하나씩 돌아 왔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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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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