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이 시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무엇이든지 예쁘고 사랑스럽게 보고자 한다면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라고 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면 예쁘고 사랑스러울 것이라고.

우리는 대부분이 빨리빨리에 길들여져 있다. 모든 것을 빨리빨리 진행하고 빨리빨리 결정한다. 좀 더 느긋하게 기다려 주고, 오랫동안 알아 간다면 훨씬 더 좋은 점을 많이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예쁘고 소중한 인연이 되려면 때로는 작고 소박하고 보잘 것 없는 ‘풀꽃’이라도 달리 보일 것이다.

김대중 씨. ⓒ이복남

이 세상에서 소중하지 않은 존재란 없다. 빨리빨리 지나치느라고 그 가치의 소중함을 모를 뿐이다. 자세히 그리고 오래 보아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사랑스러운 ‘풀꽃’처럼.

김대중(1970년) 씨는 충청남도 아산에서 1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70년생인데 이름이 하필 김대중일까. “광산(光山) 김 씨인데 중자 돌림이랍니다.” 부모님은 정치인 김대중을 알지도 못했지만 큰 사람이 되라고 아들 이름을 대중(大中)이라고 지었단다.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어 이름을 바꾸고 싶었는데 그 때는 개명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아이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를 보면 “김대중은 빨갱이”라며 놀리더란다. 그래서 정말 이름을 바꾸고 싶었지만 바꿀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지금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개명을 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이제는 그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제 이름이 좋거든요.”

부모님과 동생들. ⓒ이복남

그의 고향은 충청남도 아산시 용화동 너더리이다. 아버지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리사로 일을 했고 어머니는 너더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아이들을 키웠다. 그가 살던 너더리마을은 가운데 개울이 흐르고 양옆으로 논밭과 마을이 있었는데 너더리에는 전설이 있단다.

개울에는 오래전부터 비가 오면 개울이 넘쳐 온마을이 물난리로 아수라장이 되곤 했다. 그러자 마을 사또는 개울의 홍수에 대해서 좋은 의견을 내놓는 사람에게 큰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그 마을에는 꽃분이라는 처녀가 눈이 먼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심이 지극했다. 어느 날 삯일을 하러 나갔던 꽃분이가 밤이 늦어 길을 잃고 헤매는데 한 소년(신선)이 나타나서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는 파란색 주머니를 주면서 그 파란주머니로 아버지의 눈을 비비고, 개울에는 널빤지로 다리를 놓으라고 하더란다.

꽃분이는 이를 사또에게 알렸고 개울에는 널빤지로 다리를 놓자 더 이상 홍수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꽃분이는 사또에게 받은 상금으로 눈을 뜬 아버지와 잘 살았다고 한다. 당시 널빤지로 만든 다리를 널다리라고 불렀는데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널다리가 너더리가 된 것 같다고 했다. 널빤지로 만들었다고 해서 한자로는 판교(板橋)라고 했는데 ‘너더리’라는 지명은 지금도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김대중 씨의 이야기와 충남문화원 ebook에서 발췌-

고교시절의 한 때. ⓒ이복남

아버지는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리사로 근무했는데 주말마다 장항선 기차를 타고 왔다. 그는 온양온천국민학교를 다녔고 학교에서 친구들은 그를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놀렸다. 정치인 김대중 때문이었는데 친구들이 놀리는 바람에 공부는 뒷전이 되고 예사로 친구들과 엉겨 붙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키도 크고 덩치도 좋아서 아이들을 다 때려 눕혔습니다.”

그러느라고 공부를 못했단다. 그래도 집에 오면 울며불며 어머니에게 이름을 바꿔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그가 친구들과 싸울 때마다 어머니는 학교에 불려갔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머니는 참 당당했던 것 같다. “우리 아이만 탓하지 마라. 이름 때문에 그렇게 불리도록 잘 못 가르친 선생님 탓이기도 하다.”고 하시면서 그를 감싸 주었던 것이다.

당시 집은 비록 시골이었지만 아버지가 서울에서 생활을 하셨고 그는 아버지가 끔찍이 여기는 늦둥이 장남이라 별의별 학용품이나 장난감 등을 다 사다 주셨다.

“아이들하고 싸우느라 공부는 못했지만 당시 우리 반에서 흔들샤프나 좌석필통을 가진 아이는 저 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덩치도 크고 샤프나 필통 크레파스 등 좋은 학용품을 가진 것에 아이들이 더 질투를 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아버지가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서울 무슨 호텔에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네에 면옥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면옥으로 왔다.

“여름에 가끔 면옥에 가면 주인 할머니가 ‘대중이 왔냐’고 하시면서 냉면에 들어가는 시원하고 맑은 고기육수를 한 대접씩 내주셨습니다.”

아버지는 조리사라해도 집에서는 음식을 잘 만들지 않았다. 예전에는 전부 튀긴 통닭이었는데 양념치킨이 처음 나올 무렵 막내 여동생이 친구 집에서 양념치킨을 처음 먹어보고는 아버지를 졸랐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양념치킨을 사 오셔서 먹어 보시더니 ‘이런 거는 만들 수 있겠다’ 하시더니 그 다음부터는 양념치킨을 집에서 자주 해 주셨습니다.”

그가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가 일하시던 **면옥에는 잘 가지 않았다. 그를 반겨 주던 할머니가 없었던 것이다. 그 대신 아버지는 집에서 양념치킨을 비롯해서 갈비찜 불고기 등 여러 가지 요리를 잘 해 주셨다.

김대중 씨와 친구들. ⓒ이복남

초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중학생 때도 한반에 보통 60명 정도였는데 그의 성적은 꼴찌에서 몇 번 째였다. 시험성적표에는 아버지의 도장을 받아가야 되는데 아버지는 그야말로 ‘건강하게만 자라다오’인지 삼남매 키우시며 생업에 힘들고 바쁘셨던 어머니나 아버지는 성적에 대해서 별 로 탓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께서 말은 안했지만 사실은 아버지에게 도장을 찍어 달라 하기도 미안했습니다.”

중학교 1학년 중간고사 때 50 몇 등하는 성적표를 들고 아버지께 도장을 받으러 **면옥을 찾아 갔다.

“아버지는 면을 잘 뽑는다고 동네에서도 소문이 났었는데 그날 제가 본 아버지는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면을 잘 뽑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뽑는지는 잘 몰랐다. 요즘은 반죽도, 면도 눌러서 뽑는 과정까지 기계가 다하지만, 그때는 직접 손으로 반죽을 치대고, 면틀에 반죽을 넣고 면을 뽑기 위해 면틀의 봉을 사람의 체중을 이용해 누르면서 면을 뽑았다. 가뜩이나 마른 몸에 여름이라 날씨도 더운데 뜨거운 불앞에서 면을 뽑느라 반죽을 치대는 것도 힘든데 아버지는 봉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나를 공부시키려고 저러고 있는데 내가 이 따위 성적표를 들고 오다니…….”

그날 그는 성적표에 도장을 찍지 못한 체 울면서 돌아 왔다.

“공부를 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하니까 되데요.”

자신도 놀랄 만큼 1학기 기말시험에서 34등을 했다. 아버지는 기뻐했다.

“포기한 줄 알았는데……. 대중이 원하는 거 있으면 다 사줘라”

참고서도 사고 열심히 공부했다. 성적이 올라가니 본인은 물론이고 부모님도 좋아했다. 학년기말고사에서는 26등을 했다. 2학년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무리 열심히 공부를 해도 성적은 20등에서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영어와 수학이 안 되었던 것이다. <2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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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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