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인터뷰를 진행중인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방귀희 대표와 스위스 철학자 졸리앙.ⓒ에이블뉴스

한국의 언론은 스위스 철학자 졸리앙 알렉상드르(Alexandre Jollien, 1975년생)가 뇌성마비장애인으로 유럽에서 유명세가 있는 밀리언셀러 작가인데 왜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래서 그에게 하는 질문의 대부분은 그의 신상에 관한 것이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방귀희(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씨는 졸리앙에게 듣고 싶은 명제가 있어 졸리앙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였고, 지난 4일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졸리앙 씨를 만났다. 에이블뉴스는 방귀희씨와 졸리앙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했다.

질문: 당신이 2013년 아내와 세 자녀를 데리고 한국에 와서 생활하며 보고 느낀 체험의 사색을 담은 철학 에세이 <왜냐고 묻지 않는 삶>에서 장애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확인하고 싶어서 만나자고 하였다.

‘장애를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고 하였는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긍정으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통속적이지 않은가?

답변: 장애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모든 게 다 잘 될 것이고 존재의 비극이란 없다고 주장하는 소위 쿠에(암시)요법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성서의 '전도서(코헬렛)'는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허무로다 허무로다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유명한 구절 말이다. 요컨대, 그것은 일체의 환상과 인위적인 안위를 버리고, 존재의 덧없음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삶의 자세를 의미한다.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꿈과 환상, 유토피아에 사로잡히지 않고 내가 처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똑똑히 주시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애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에서 조금씩 치유되고 있다.

이는 살아가면서 장애의 정도를 조금씩이나마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포기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자세다. 그것은 일상의 위생에 주의하고, 영적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참된 벗과 가족, 이웃과 연대해가며 살아가려는 건강한 의지를 다지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달성되는 그 무엇이다.

작가, 철학자, 장애인, 이방인… 어떤 꼬리표든 그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순간 고통이 치솟는다는 졸리앙.ⓒ에이블뉴스

질문: 뇌성마비로 걷는 모습이 흔들거리는 것을 보고 술에 취했다고 하는 사람에게 졸리앙 씨는 자신이 장애인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 순간 차라리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는가?

답변:붓다는 우리가 집착하는 순간 고통이 따른다라고 가르쳤다. 만일 내가 나의 어떤 한 이미지나 꼬리표로 나 자신을 축소시켜 생각한다면, 나는 스스로 고통을 짊어지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현실은 매순간 변하는 것인데 반해 꼬리표와 이미지는 항상 고착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에게 갖다붙이는 꼬리표가 심지어 아무리 그럴싸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짜다. 존재를 하나의 형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고정된 꼬리표와 형상을 뛰어넘어 매순간 현존하는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역할과 기능, 꼬리표로 우리 스스로를 축소시키려는 온갖 성향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장애인이든 술주정뱅이든....... 그러기 위해서는 '고착되지 않는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제기해야만 한다.

(작가, 철학자, 장애인, 이방인… 어떤 꼬리표든 그것에 자기 자신을 가두는 순간 고통이 치솟는다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질문: 나의 장애를 똑같은 방식으로 2분 이상 체감하지 못한다는 것, 나는 내 장애를 실험 중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답변: 사실 장애라는 것은 매일 조금씩 변하는 현재 진행형의 현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단번에 결정되는 삶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유형의 것이든 견딜 수 없이 끔찍한 일이다. 나는 내일에 대한 부담 없이 나의 장애를 매일 매순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알콜중독자 갱생모임에 내게 매우 소중하게 여겨지는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곳 사람들은 알콜에 의존하는 사람에게 맑은 정신 상태를 항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술을 절제하는 노력을 한 시간 단위로 새롭게 다지는 방식을 채택한다. 한 시간 노력하고 또 다른 한 시간 노력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식이다. 나는 이것이 매우 훌륭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장애라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척하기보다는 매 시간, 매 순간 그것을 일상의 삶 속에 받아들이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거다. 그러다 보면 장애로 인한 괴로움이나 일상에서 닥치는 그밖의 괴로움의 차이가 허물어진다.

(생각해보니 나도 하루 24시간 장애인으로 살고 있지는 않다. 물리적 장벽에 부딪힌 순간, 차별을 받았을 때 그 원인이 장애에 있다고 여겨진 순간 장애를 느낀다. 좀 더 솔찍히 고백하면 청소년기에는 물리적, 인식적 장벽 앞에서도 장애를 인정하지 않고 장애와 무관한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애썼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로움이라는 졸리앙씨.ⓒ에이블뉴스

질문: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다시 말해 한국의 장애인식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답변: 내 고향 스위스는 물론이고 내가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는 유럽과는 큰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는 아침에 산책을 나가면 아이들이 나를 놀린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표현이지 조롱이 아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소리내어 나를 놀리지 않는다. 놀리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참는 것 같다. 대신 무관심하다.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한다. 관계를 맺으려하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장애인을 틀 속에 가둬놓고 접근 금지 상태에 있다.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외로움이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며 틈틈이 엄습했던 고독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자 가슴이 더욱 답답해진다. 장애인을 놀리면 안된다고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장애인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 그럼, 한국 장애인들이 갖고 있는 장애인식은 어떤가

답변: 외적인 조건에 민감한 것 같다. 그래서 몸에 대한 자기혐오 경향이 보인다. 사람은 아프면 몸을 보호하듯이 장애가 있을수록 몸을 보호해야 한다. 자기 몸을 부정하면 타인도 장애인의 몸을 부정하게 된다.

장애와 비장애로 나누는 이분법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장애인이 먼저 관대해져야 한다. 장애로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여유를 갖고 포용하면서 인간에 대한 신의(信義)를 쌓아가면 평등한 인간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질문: ‘의식은 거울과 같아서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한 것과 관련해서 장애가 아름다우려면 장애를 보석으로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할텐데 그것이 가능한가.

답변: 장애를 놓고 아름다우냐 흉하냐를 논할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장애는 누군가에게 엄존하는 그 무엇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속에 현존하기 위해서는 모든 형용욕구와 판단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그런 뜻에서 모든 현실은 그 자체로 완벽하다고 했다. 그러자 누가 그에게 시각장애인은 완벽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이렇게 반문했다. "당신은 새처럼 날개가 없는 것이 안타깝나요?" 상대가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자 스피노자가 또 물었다. "만약 당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날개를 달고 있다면 그때도 날개 없는 것이 안타깝지 않을까요?"

대답은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였다. 요컨대, 실제로는 부족한 것이 아님에도 남과 비교하는 순간 부족한 것이 된다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란 종종 장애가 없는 남과 비교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그 무엇이다. 의식이 거울과 같다는 말은 현실을 틀어쥐거나 내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4일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방귀희 대표와 스위스 철학자 졸리앙.ⓒ에이블뉴스

질문: 졸리앙은 장애가 심한 것도 아닌데 17년 동안 요양시설에서 생활한 것이 조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스위스 장애인들은 요양시설로 보내지는 것이 일반적인가.

답변:그 당시만 해도 장애인을 보살피는데 많은 노고와 전문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그런 것들이 갖춰져 있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으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숙시설에 나를 맡겨야만 했다. 내 입장에서는 그로부터 많은 고통이 시작된 셈이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장애인을 일반학교에서 교육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시급하다. 이는 장애를 가진 아이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그들을 자기와 함께 살아갈 존재로 받아들여야 할 비장애아동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사회구성원으로 아이를 교육함에 있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과연 있겠는가

질문: 철학은 실용학문이 아닌데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취업이 걱정되지는 않았는가.

답변:언젠가 소크라테스에 관한 책을 읽는데, ‘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어하기보다는 최선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라는 구절을 본 적이 있다. 그 책에서 말하는 최선의 삶이란 외적 조건을 바꾸려 하기보다는 내면의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진다. 그때 이후로 나는 세상을 파악하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되었고,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를 찾아나서게 되었으며, 더 큰 기쁨과 평화를 향해 매일 발전하는 존재가 되기로 결심했다. 철학은 나에게 그 길을 가는 여러가지 도구를 제공해준 참으로 고마운 친구다.

질문: 기독교과 불교 두 가지 종교를 다 좋아하는 독특한 종교 세계를 갖고 있는데 가톨릭과 불교의 장애인관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는가.

답변: 불교와 기독교 모두 장애 여부와 무관하게 인간 그 자체를 대상으로 이야기한다. 어렸을 적에는 비장애인과 장애인으로 세상을 구분하는 사람들의 행태에 무척 놀랐었다. 나에게 세계는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일 뿐이다. 불교는 나를 안정시켜준다. 불교는 정신의 지혜를 제시해주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천적 방법과 거대한 지혜를 동시에 이야기해준다.

불교는 덧없는 감정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고 살아가게끔 도와준다. 기독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 이 세상의 소외과 거짓, 에고이즘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내면의 회심을 이루어,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인간이란 존재는 그 겉모양과 나약함으로 재단할 수 없으며, 보다 깊은 심연의 가치로 정의되어야 할 존재임을 말해준다.

한마디로 불교가 내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다면, 기독교는 내 마음을 위로해준다. 그 둘 다 나를 깊은 내면으로 이끌어 그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찾게 해준다.

(졸리앙은 중국, 일본 등 아시아 그 어느 국가도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달라이라마를 친견하기 위해 네팔에 2주 정도 머문 것이 전부여서 아시아의 장애인식을 비교해볼 수는 없었다. 그가 한국에 온 이유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서 불교를 가르치는 버나드 천달 교수가 ‘라디오 프랑스’에 출연하여 한 인터뷰 내용을 인터넷으로 듣고 불교 공부를 하고 싶어져서인데, 3년째 한국에 머물고 있고 떠날 날짜를 정하지 않고 한국에 살고 있는 것은 한국의 서울거리가 거대한 인생학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은 철학자 눈에 비친 한국사회는 다양성이 역동적으로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 변화 속에 장애인 문제도 포함되어있다. 졸리앙이 한말 가운데 두가지 메시지가 크게 남는다.-비장애인은 장애인과 인간적인 교류를 하자-장애인은 여유를 갖고 관대해지자.)

지난 4일 인사동의 한 갤러리에서 만난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방귀희 대표와 스위스 철학자 졸리앙.ⓒ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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