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잘 살고 있는데 고통의 잔은 그에게만 주어진 것 같았다. 그렇게 멍하니 시간만 죽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험한 세상 다리가 되어’였다. 누가 누구의 다리가 된다는 말인가. 노래 가사에는 오히려 반발이 생겼지만 그에게는 노래 즉 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그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용기를 내어 보조기를 하고 목발을 짚고 음악실을 찾아 나섰다. 대구 중앙로 포정동에 빅토리아 음악실이 있었다. 입장권 한 장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있어도 되고 주스나 율무차 한 잔을 마실 수도 있었다. 한 번 가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날마다 음악실로 출근을 했다. 그럼에도 대인 기피증은 여전해서 음악실 구석에 콕 처박혀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어떤 노래들이 있었을까.

“조동진의 제비꽃, 양희은의 백구가 생각나네요. 요즘 젊은 애들이 깜놀(깜찍 놀람) 심쿵(심장이 쿵쿵) 같은 신조어를 쓰던데 그 무렵 저는 죽도리아(하루 종일 죽치는 사람)였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나 지났을까. 음악실에는 6명의 DJ가 있었는데 앞의 DJ가 엔딩멘트를 하고 나갔는데 다음 DJ가 오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던 음악실 주인은 죽도리아로 낮이 익은 그에게 대신 좀 해 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글쎄요?”

DJ라니, 그 또한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일었지만 주인이 원하기에 떨리는 마음으로 겨우 응했다. 서당 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했던가, 그동안 들은 풍월로 DJ 흉내를 냈는데 주인은 이렇게 좋은 목소리를 가진 줄 몰랐다면서 아침에 DJ를 해 보라고 했다. 아침에 연습생을 하다가 그의 선곡이 맘에 들었는지 마지막 타임을 맡겼다.

“그 때만 해도 통금시대라 10시 40분까지 했는데 밤에는 거의 손님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밤 시간의 DJ를 맡고 나서 손님이 하나 둘씩 늘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DJ 사회에서 지인도 생기고 제법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경주 역전에 있는 음악다방에서 DJ를 구하니 자리를 한번 옮겨 보라고 했다.

경주로 갔다. 그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고 DJ박스 속에서 음악에 묻혀 살다보니 어느새 장애 같은 것은 잊혀졌다.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 것이다.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그 무렵 포항MBC에서 ‘DJ 콘테스트’가 열렸다. 우승자에게는 ‘별이 빛나는 밤에(이하 별밤)’ 게스트로 출연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졌는데 그는 우승했고 포항MBC ‘별밤’에도 출연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구경 갔던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넘버나인(number9)’ 음악실 실장을 맡게 되면서 그만 강릉에 눌러 앉게 되었다. ‘넘버나인’에서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는 클래식을 틀어 주었다. 그렇게 클래식 해설까지 하다 보니 강릉 KBS에서 클래식시간의 방송 제안을 받았다. 경력은 있지만 학력이 짧다는 이유로 탈락의 쓴 잔을 마시면서 무엇을 하려면 스펙을 쌓아야 한다 싶어서 대학을 마음먹었다.

그 무렵 강릉대학교 서00 교수가 ‘바로크’라는 클래식음악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부회장을 맡게 되었다. 성악과 여학생이 총무를 맡았는데 ‘바로크’동호회를 같이 하면서 그 여학생과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여학생의 집에 인사를 하러가니 장인 될 어른은 그의 장애 보다는 학력을 문제 삼으며, 학비를 대 줄 테니 학교를 다니라고 했다. 참으로 좋은 어른이었다.

그는 ‘넘버나인’ DJ를 하면서 뒤늦게 강릉대학 성악과를 다니면서 강릉 MBC에서 ‘별밤’도 진행했다. ‘바로크’의 총무 여학생은 졸업을 하고 발령을 받아 음악교사가 되자 결혼을 했다. 그의 성악과 학비는 약속대로 장인이 대 주었다. 그는 잘 나가는 DJ였고 자신이 운영하는 음악카페도 날로 번창해서 돈도 제법 벌었다. 두 번째 인생이 시작 된 것 같았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돈이 생기자 한 친구가 액세서리 공장을 제안했다. 중국에서 싼값에 들여와서 잘 만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도 솔깃해서 친구와 동업으로 액세서리 공장을 준비 하던 중 준공도 하기 전에 친구는 중국으로 달아나버렸다. 알고 보니 친구는 그의 돈을 노린 사기꾼이었다.

수소문해서 친구가 있다는 중국 청도까지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였다. 빚더미에 올라않게 되자 DJ고 뭐고 그는 빚쟁이를 피해 숨어 다니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술주정꾼이 되어 갔다.

“저는 숨어 있으면 되지만 빚쟁이들이 아내 학교로 찾아가서 아내를 못 살게 굴었습니다.”

그의 잘못이니 자신은 참아내야겠지만 아내가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아들이 둘이나 있었지만 그는 이혼을 결심했다. <3편에 계속>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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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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