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서울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친척집에서 하루 밤을 자고 다음 날 S병원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내려왔다.

잔존시력을 살릴 수 있다고 해서 서울까지 갔지만 몇 주가 지나도 차도는 없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는 더 이상 S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중앙대병원에서 보조공학기기 즉 저시력 확대경을 맞추었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필리핀 어학연수. ⓒ이복남

이렇게 눈을 감고 어떻게 살지? 생각하면 눈물만 났다. 그러나 슬픔의 눈물은 아무도 몰래 혼자서 흘려야 했다. 어머니가 그의 눈물을 보신다면 더 슬퍼할 것이고, 그리고 동생은 고3으로 수능준비 중이었던 것이다.

“동생은 자신이 가고 싶은 도시공학과를 나와서 관련 된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동생이 미안했다고 하더군요. 그 때는 학교 다니고 수능 보는 동생이 좀 서운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다 지난 일이라 동생하고 잘 지낸다고 했다. 필자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장애인복지를 공부한다면 동생에게 서운한 게 아니라 오히려 미안해해야 합니다.”

장창웅 씨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그 때, 어머니가 누구 편이었을까요.

“내 편이요.”

바로 그거였다. 대부분의 어머니가 그랬다. 집안에 장애아가 있으면 어머니는 장애아를 돌보느라 비장애아는 뒷전이라 소외를 느끼지만 비장애아가 철이 들었을 경우에는 장애인 형이나 동생을 두고 차마 말도 못하고 혼자서 스트레스를 받기가 일쑤였다.

어학연수에서 필리핀 안내원들과. ⓒ이복남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눈이 나빠져서 병원을 전전했다. 동생은 수능을 앞 둔 고3인데도 어머니는 동생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고3이라고 하면 전 가족들이 눈치를 봐야 하는 특등생인데 그럼에도 고3 동생보다는 그의 눈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가 병원 다니기를 그만 둔 후에도 한의원으로 데려가서 침을 맞히고 약을 달였다. 그리고 눈에 좋다는 것은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구해 왔는데 제일 많이 먹은 것이 간과 당근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러실 때 동생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듣고 보니 그러네요. 그러나 그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무튼 어느 날 갑자기 눈을 감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꼼짝도 안했다. 할아버지는 그를 볼 때마다 혀를 끌끌끌 차시며 안타까워하셨으나 그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경로당에 계셨기에 잘 마주치지도 않았다. 군대는 어떻게 했을까. 바로 면제가 되던가요?

“대학생이 된 동생하고 같이 신검을 받으러 갔습니다.”

동생은 현역이었는데 그는 눈이 잘 안 보인다고 했더니 보호자(동생)를 불렀고 다른 검사는 할 필요가 없으니 병사용진단서를 떼어오라고 했다. 처음부터 병사용진단서를 가져갔으면 바로 면제인데 잘 몰랐다고 했다. 군대는 면제를 받았지만 그에게 군대가 대수겠는가.

“처음에는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어는 정도 마음이 가라앉아 텔레비전을 보게 되더라고요.”

물론 그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텔레비전을 볼 수는 없고 소리만 들었는데 주로 애니메이션이나 야구프로를 보았다. 하루 종일 방안에서 세월을 죽이고 있으려니까 그 보다는 어머니가 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트래블 프로티어 참여. ⓒ이복남

“어머니께서 시각장애인들에게 재활교육이 있다는 것을 어디서 들으신 모양이에요.”

2007년 여름, 처음에는 재활교육보다는 어머니의 소원풀이를 위해서 마지못해 집을 나섰는데 가보니까 그게 아니었다.

“저만 그런 줄 알았는데 다 시각장애인인거예요.”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하는 6개월짜리 프로그램이었는데 14명 중에 그는 제일 막내였다. 모두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지만 녹내장, 당뇨병, RP, 사고 등등 이유와 원인은 모두가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같은 아픔을 가졌기 때문인지 서로를 잘 도아주고 이해해주었다.

“재활교육을 받으면서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흰지팡이를 짚고 혼자 다니는 법과 점자를 배웠는데, 복지관에서 차로 데려가고 집에도 데려다 주었기에 별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점자를 읽고 쓰는 숙제를 내주었기에 집에 와서도 할 일이 생겼다.

재활교육을 받다 보니 주변에서는 맹학교를 가라고 했다. 그도 그렇게 마음을 먹고 2008년 3월 새학기에 맹학교 고등부에 입학을 했다. 그는 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고등학교 3년 과정을 마쳐야 한다는 것과 안마사 자격증을 위한 이료(理療)과목이 부담스러웠다.

결국 그는 맹학교를 그만두었는데 어머니는 맹학교 자퇴를 한사코 말리셨다. 그래도 그가 고집을 부리자 정 그렇다면 학교를 그만두는 대신 검정고시 학원을 다니라고 했다. 그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대입검정학원에 등록을 했다.

그러나 판서 위주의 학원 강의를 그는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칠판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학원을 그만두고 동영상 강의를 보면서 집에서 혼자 공부했다. 대입검정고시는 국어 수학 영어 사회 과학 국사 등 6과목은 필수이고 선택이 2과목인데 몇 달 공부를 해 보니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시험을 칠 수가 없었다.

“자퇴 한 사람은 8개월이 지나야 시험자격이 있답니다.”

그동안 누나와 동생이 기출문제를 읽어주면서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다. 2009년 4월에 대입검정고시를 합격했고 다음해 수능을 보았다. <3편에 계속>

[설문조사] 2013년 장애인계 10대 키워드(20명 선정, 천연비누세트 증정)

* 이복남 기자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로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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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웃이 행복하지 않는 한 나 또한 온전히 행복할 수 없으며 모두 함께 하는 마음이 없는 한 공동체의 건강한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진 자와 못 가진자,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평등하게 공유할 수 있는 열린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쓸모 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가꾸어 함께 어우러져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사랑으로 용서하고 화합하여 사랑을 나눔으로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복남 원장은 부산장애인총연합회 사무총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하늘사랑가족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하사가장애인상담넷www.gktkr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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