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 중. ⓒ임경식

19세 청년에게 찾아온 사건

1977년생인 임경식은 실업계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취업이 되었다. 보통 2학기에 취업이 되는데 그해는 1학기부터 취업이 되어 18세에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1995년 9월 회사 선배가 군에 입대하게 되어 송별회를 마치고 친구 집으로 가기 위해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친구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급커브 골목에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짧은 순간이었지만 갈등하였다.

자동차를 박으면 돈이 많이 깨질 것이고, 자동차를 피해 오토바이를 쓰러트리면 뒤에 탄 친구가 다칠 것 같아서 친구를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자동차를 선택했다. 부딪히고 난 후 정신이 가물가물해져 갔다.

정신이 들었을 때 친구는 멀쩡하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이 놓였다. 자신도 곧 병원을 나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몸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얼굴에 묵직한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찬찬히 살펴보니 자기 팔이었다. 자기 팔이 자기 얼굴 위에 얹혀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때 비로소 자신 몸 상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그때 임경식은 슬프다기보다 두려웠다.

길고 긴 병상 생활

사고 나기 4년 전에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생겨 당신 몸도 힘든 상태여서 아들을 간병할 수 없었다. 간병인을 둘 형편도 못되어 어린이집 교사인 누나가 자신의 꿈을 접고 동생을 간호하였다.

어머니는 비장애인 걸음으로 15분이면 올 수 있는 거리를 50분씩 걸려 매일 교회에 가서 아들을 위해 기도를 했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심하게 대들기까지 하였다.

누가 자기를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그는 다른 사람들을 특히 가족들을 원망했다.

무의미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19세 청년이 33세가 되기까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살았다. 옛날 친구들과는 만나지 않았다. 위로의 말이 상처가 되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근사하게 발전해 가고 있는데 자신은 얼굴만 살아남아 나무토막처럼 꼼짝도 못하고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대신 국립재활원에서 알게 된 장애인 친구들이 생겼다. 구필 화가도 있었고, 게임으로 용돈을 버는 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필화가가 가장 멋있어 보였지만 그림에는 소질이 없어서 자신이 없었다. 학창 시절 육상, 야구 등 운동을 좋아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실 정도로 그는 활동적인 성격이었다.

활동 모습. ⓒ임경식

입에 붓을 물다

어느 날 그림 그리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발견하고, 입에 붓을 물고 그것을 그대로 흉내내 보았다. 뭔가에 몰두하며 생기는 마음의 안정감이 좋아서 동영상을 스승삼아 매일 그리고 또 그렸다. 1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림 한 점이 완성되었다.

그림을 제대로 그리고 싶어서 안양에 있는 장애인화실 소울음아트센터에 가서 그림 공부를 하였다. 그는 바깥세상이 그리워서 그런지 주로 풍경을 그렸다. 지인들이 여행을 가서 멋있는 풍경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면 그것을 화폭으로 옮기면서 자신도 그곳에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센터에서 매년 단체전을 개최하는데 그도 작품을 출품하게 되었다. 전시회장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을 보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더욱 열심히 작품에 집중하였다.

이렇게 그림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 무렵 또 다른 고난의 파도가 밀어닥쳤다. 어머니 건강이 악화되어 한 집에 두 명의 중증장애인이 있으니 누나 혼자 보살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기술자여서 젊은 시절 중동에 가서 해외 근로자로 일을 하며 돈을 제법 버셨지만 경기 침체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다.

임경식은 자신이 집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전라도 완주에 있는 시설로 생활 터전을 옮겼다.

보통 시설로 가면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는 오히려 자립하기 위해 시설을 택했다.

시설은 원래 개인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만 원장 신부님께 그림을 그리게 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드렸더니 컴퓨터교육실 구석에 이젤과 물감을 올려놓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곳에서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시고 전등도 설치해 주며 지지해 주었다.

그때는 옆에서 물감을 바로바로 짜 주는 사람이 없어서 수채화를 하였다. 수채화는 물만 있으면 물감을 한꺼번에 짜 놓고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설 생활을 1년 6개월 정도 하였을 때인 2011년,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아들이 되고 말았다.

화가가 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온 후 다시 소울음아트센터에 나갔다. 그동안 회원들의 활동이 더 활발해졌다.

단체전은 물론이고 개인전도 열며 많이 성장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센터 그림지도 선생님이 결정적인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림에 자기 자신을 표현해 보세요. 관객은 작품을 통해 작가의 메시지를 읽거든요.”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 바로‘꿈을 꾸다’시리즈이다. 임경식은 사고 후 자신은 두 다리 두 팔이 다 결박되어 갇혀 있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어항 속에 혼자 남은 금붕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어항속에서 금붕어를 밖으로 꺼냈다. 그 작품이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임경식의 활동이 지역신문에 소개되었는데 그 기사를 본 인천 미추홀도서관으로부터 개인전시회 제안을 받았다.

개인전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지만 꿈같은 일을 거절할 정도로 철이 없진 않았다. 준비 기간이 8개월 정도 있었기에 열심히 준비하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아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2주에 작품 1점을 완성할 수 있었다. 책임감을 갖고 일에 몰두하면서 모처럼 행복하였다. 드디어 첫 번째 전시회가 2014년 겨울 미추홀도서관 1층에서 개최되었는데 도서관 외벽에 대형 현수막이 걸리고, 팸플릿도 제작되었다. 그리고 전시회 소식이 언론 이곳저곳에 소개되었다. 진짜 화가가 되었다는 자존감이 생겼다. 그날 가장 많이 생각나는 사람은 엄마였다.

임경식은 엄마한테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자기가 장애인이 되고 나니 편마비로 한쪽 팔을 못쓰고, 다리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걷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그런 몸으로 아들 밥을 떠먹여 주시고 또 살겠다고 그 밥을 받아먹는 자신이 너무 비참해서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말했다.

“엄마, 더 이상은 못살겠어. 나 좀 죽여 줘. 부탁이야.”

“엄마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어서… 정말 미안해.”

임경식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지켜 주셨다. 어머니가 보여 주신 의연함에서 그는 죽어도 되는 삶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그는 공모전에 출품을 하기도 하고, 장애인기능경기대회 미술 부문에 출전하여 좋은 성적을 내면서 2016년 그의 목표였던 세계구족화가협회 회원이 되었다.

9년 동안 엄마와 동생을 돌보느라 자신의 삶을 희생한 누나가 결혼하여 매형이 생겼는데 마침 초등학교 교사라 학교에 가서 어린 학생들에게 장애 인식개선 교육 강의도 하고, 교사들에게도 장애 인식개선 교육 강의를 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화가 임경식의 대표작1. ⓒ임경식

세상과 소통하려고

2019년은 그를 세상 밖으로 완전히 나오게 하였다. CBS-TV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 출연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하였고, 이를 통해 LGU+ 의 CSR 캠페인 영상 ‘아버지… 당신이 웃고 있어 행복합니다’ 에 참가하게 되었다.

19세 오토바이 사고 이후 목 아래로 움직일 수 없게 된 구필화가와 여든 살 아버지의 U+우리집AI로 달라진 일상을 담아냈다. 영상에서 그는 지체장애인을 위한 음성명령으로 전등을 켜고 끄고, 이젤 높이를 조절하고, 교통약자용 지하철정보 확인 AI 서비스로 지하철 엘리베이터의 위치를 알아내어 아버지 도움 없이 외출을 나가서 세상 구경을 하고 눈에 담아 온 벚꽃을 그려서 아버지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는데 800만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이 영상이 SNS에서 화제가 된 덕분에 임경식을 포함한 구족화가 5인 특별전시회가 2019년 7월 LGU+ 용산사옥 로비에서 개최되어 주목을 받았다.

그림을 1시간 정도 그리면 입이 마비되고, 목이 굳는다. 하지만 붓을 놓지 않는다. 4시간 정도 작업을 해야 물러선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한 노고를 생각하면 쉽게 쉴 수가 없다.

올해 아버지는 81세가 되었다. 아버지는 붓을 긴 막대기에 붙여 헝겊으로 단단히 묶고, 물감을 짜서 동그란 접시에 간격을 맞춰 가지런히 배열시킨다. 아들의 붓질 높이에 맞춰 이젤의 높이를 맞춘다. 아들은 이 모든 과정에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붓이 헐렁거려요.”

“꽉 묶었는데….”

이제 아버지도 힘이 빠지신 것이다. 임경식도 44세, 자신의 몸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면서 아버지는 그대로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요즘 그는 거북이를 그린다. 아버지가 오래오래 사시는 바람이기도 하고, 느릿느릿한 거북이가 바로 자기 자신인 것 같아서이다.

어항 밖으로 나온 금붕어가 거북이가 되기까지 20여 년이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 생명의 소중 함을 알고 있다. 죽어도 되는 삶은 없다는 것이 그가 창작 활동을 통해 세상에 보내는 메시지이다.

화가 임경식의 대표작2. ⓒ임경식

임경식

#주요 경력

세계구족화가협회, 한국장애인미술협회 회원, 소울음아트센터 이사

# 개인전

입으로 그리는 꿈, 초대전, 인천 미추홀도서관 꿈을꾸다, 임경식 작품전, 경인미술관 꿈을꾸다, 초대전, 인천 수봉도서관

# 단체전

2009~2018 일어서는 사람들의 기록전. 2014~2017 A-AF 장애인창작 아트페어 1th Han River international ArtFestival, Incheon Art Fair Mecenat전 구족회화 회원전, 하나비전센터 3인3색 전, 한·중·일 장애인 미술교류전, 소울음 아트페어 개인 부스전, 행복에세이 전, 소울음 초대전 구구갤러리, 한·일 장애인 in 후쿠오카 인천아시아 경기대회기념 희망 빛을 그리다, (사)경인복지회부설 인천장애인예술협회 창립기념전 LG사이언스파크 행복마루 소울음 초대전, 순천 국립 옥천골 미술관 사는 세상 희망의 그림전 LG 유플러스 5G 공덕역 전시, 칸데스키와 현대작가 100년의 소통 미디어 아트전시회 구족화가와 같이 짓는 미소전 인천 송도 포스코건설 사옥, 포스코 건설 더 샵 갤러리

# 수상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 전북지역 1위, 대한민국 환경미술대전 입선, 지방장애인기능경기대회 인천지역 1위, 전국장애인기능경기대회 3위, 대한민국 장애인 미술대전 장려상 특선 입선, 희망키움 경진대회 공모전 특선 입선, 국제장애인미술대전 입선, jw 꿈을 그리다 공모전 입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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