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애인개발원 최경숙 원장. ⓒ한국장애인개발원

어려움 없이 자라왔을 것 같은 이미지이다. 그런 사람이 장애인운동가로 활동하며 이전 같으면 여성장애인에게 쉽게 오지 않는 기회인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한국장애인개발원(이하 장애인개발원) 원장이 되었다.

최경숙 원장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최 원장은 1967년생으로, 청주대 건축공학과와 부산대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하고 부산대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쳤다.

부산여성장애인단체에서 활동을 하다가 여성장애인 최초로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근무했고, 2018년 1월부터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장애인 인권 분야에서 전문가로서 역할을 해 왔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최경숙 원장. ⓒ한국장애인개발원

Q: 장애인개발원 원장으로 장애인계에서 예견하는 분위기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막상 나는 몰랐다. 장애인 동료들과 함께 장애인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사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직함을 갖고 있지 않던 시기에도 나는 장애인 복지 현장에 있었다.

장애인개발원 원장은 공모를 통해 선발이 되기 때문에 응모를 했을 뿐이다. 타이밍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문재인 정부는 여성 장관 30%, 여성 고위공직자 10% 비율로 확대하기 위한 공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응모를 하고 나는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예견이라니 조금 의외다.

Q: 장애인개발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장애인정책과 관련해 지역별 편차는 없는지, 서비스가 평등하게 제공되고 있는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보고 배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통합 관리하는 것이 우리 장애인개발원의 역할이라고 본다. 지난 5월 28일 ‘장애인복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장애인개발원이 장애인정책 전문기관으로써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장애인복지법에 설립 근거만 명시되어 있었던 것에서 장애인개발원의 주요 사업이 이번에 법에 조문으로 명시되면서 기존에 수행해 온 사업 들은 좀 더 안정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고, 변화된 환경에 발맞춘 새로운 사업(장애 인식 개선, 장애인에 대한 재난안전대책 강화 등)에 대한 법적 기반도 마련되었다.

장애인개발원은 장애인정책 전문기관이다. 장애인정책 개발을 위한 연구가 중점이다. 세부적으로 직업재활 지원·일자리 개발·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활성화 등 장애인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사업, 장애물없는생활환경(Barrier-Free) 인증 등 물리적 환경개선을 포함해 사회 전 분야의 접근성을 개선해 나가는 유니버설디자인 환경 구축 사업을 추진하며 중앙 및 지역발달장애인지원센터 운영, 아·태 장애인의 권리실천을 위한 인천전략기금운영사무국 역할 등 그동안 상대적으로 더 소외되어 왔던 장애아동이나 발달장애인, 그리고 개발도상국 장애인을 위한 지원도 하고 있다.

Q: 장애인개발원 원장으로 부지런한 행보를 보였다. 어떤 성과가 있었는가?

지난 4월 17일 장애인개발원 원장으로 취임해 이제 겨우 5개월이 지나 내세울 만한 성과는 매우 미흡하지만 취임하자마자 내부 조직문화부터 바꾸기 위해 직원들과 소통을 많이 했다. 직원이 300여 명인데 정규직은 64명이다.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물론 정부 방침으로 이루어진 일이지만….

장애인개발원 밖에서 해 주시는 비판에도 귀기울였다. 그래서 장애인 단체장과 여성장애인 리더들과 연이어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구호에 그치지 않고 실천해 나가기 위한 내 소신이 성과의 기초가 될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앞으로 3년간 장애인개발원을 잘 이끌어 가기 위한 고민을 담아 지난 6월 28일 혁신로드맵을 발표했다. 앞서 혁신위원회를 13명으로 꾸렸다. 이 가운데는 장애인 단체와 학계, 노무 및 법조 등 분야별 외부 전문가가 9명이 있고, 내부 구성원으로는 노사협의회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세 차례 전체회의, 조직·인사 및 사업 분과별 회의, 직원설명회 등을 거쳐 수렴된 의견을 모은 결과이다. 여기에는 장애인 고용률 확대, 전문분야 개방형 직위 확대, 노동 이사제 도입, 장애인당사자의 사업 참여 강화 등 조직과 사업 전반의 혁신을 담았다.

혁신로드맵에서 장애인 고용률을 현행 6.4%에서 1년 내 10% 이상 확대하고 이 가운데 여성장애인은 50%까지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외에 장애인 일자리와 관련해 서는 중증장애인 채용카페 I got everything을 10월 현재 전국 28호점까지 개소해 중증장애인 90여 명이 채용됐고 ‘퍼스트잡’ 사업으로 스타벅스와 업무협약을 맺고 중증장애인 100여 명을 스타벅스 매장에서 훈련받고 취업까지 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Q: 장애인문화예술 행사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있는데 장애인문화예술은 장애인개발원에서 그동안 관심 밖의 사업이었다. 장애인개발원의 노선이 바뀐 것인가.

복지건 문화건 장애인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 관심이 있다. 초대해 주시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열심히 참여하려고 한다. 그리고 연구의 폭을 장애인문화예술로 넓혀 갈 생각이다.

장애인개발원은 1991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장애인문인협회, 한국장애인미술협회와 함께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과 대한민국장애인미술대전을 개최하여 문학과 미술에 재능있는 수 많은 작가들을 발굴하였다.

장애인체육 사업이 지난 2005년 문화체육관광부로 이관되면서 자연스레 장애인문화예술사업도 2015년에 장애인개발원에서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으로 이관되었다. 장애인문화예술 분야뿐만 아니라 장애인 관련 다양한 분야가 여러 부처와의 협업이 필요한 만큼 범부처 차원으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Q: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재산등록을 보니 재산이 생각보다 적어 놀랐다.

현재 서울에서 전세를 살고 있고, 부산에 작은 아파트가 있을 뿐이다. 장애인계에서 오래 일했어도 수입이 발생한 것은 인권위 상임위원 시절이다. 그때 저축을 했다. 혼자 사니까 생활 비가 적게 든다.

부산에 아파트를 구입한 것도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사를 다니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왜 부유하게 보였는지는 몰라도 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아버지는 아주 평범한 노동자이다. 두 오빠가 사회생활로 기반을 잡고 있어 그 덕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장애인개발원 최경숙 원장. ⓒ한국장애인개발원

Q: 어린 시절이 궁금하다.

3세 때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에서 내가 유일한 장애인일 정도로 시골은 장애인이 드물었다. 장애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바깥으로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당시 건설 경기가 좋아 건축학과를 나오면 취업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과에서 나만 빼고 모두가 취업이 된 상태에서 졸업을 하였다. 그즈음에서야 나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였고, 장애인이 사회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꼈다.

1급 건축기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던 시기에 지도교수가 나만 빼고 4학년 졸업생 전원과 취업 상담을 하여 대기업에 보내기도 하고, 시공 현장 사무소로 보내기도 하였는데 나의 취업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장애 때문에 배제가 된 것이다.

엄마의 높은 교육열로 대학 교육까지 받았지만 사회로 나가는 취업의 관문은 내 힘으로 뛰어넘을 수 없었다. 85학번으로 89년에 졸업을 했는데 그때 서울에서는 장애인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작은 소도시는 마치 장애인은 없는 존재인 양 관심 밖이었다.

Q: 장애인복지에 뛰어든 계기는.

도피처가 필요했다. 그래서 직업재활원에 입소했다. 나한테는 정말 새로운 경험이었다. 장애인의 삶을 그때 처음으로 경험했다. 가정환경도 다르고 학력 수준도 각양각색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서로 협의하며 사는 방식을 익혔다.

재활원에서 직조 기술을 배웠는데 기술보다 더 소중한 경험을 하였다. 통제된 시설 환경이었지만 기숙사 생활이 싫지 않았다. 밥도 잘 먹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잘 지냈다.

그곳에서 장향숙 전 의원(열린우리당 비례대표)을 만났다. 장 전 의원은 부산에서 왔는데 장애인 문제에 대해 공감하는 것이 많아서 금방 가까워졌다. 재활원에서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하면서 부산으로 이주해 본격적으로 장애인운동을 시작하였다.

Q: 여성장애인 운동을 한 것은.

부모님은 충청도 양반이다. 여자는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분이다. 그래서 여자가 사회운동을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기셨다.

하여 나는 애써 부모로부터 독립하려고 하였다. 장애인복지 현장에 있다 보니 사회복지에 대한 이론이 필요하여 부산대 사회복지학과로 학사 편입을 하여 같은 학교 대학원에 진학한 후에는 사회복지학과 여성학을 공부했다.

여성학을 전공으로 한 것은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장애인복지 현장에 여성장애인이 수적으로 적어서 여성장애인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8년 5월 부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 당시 서울 연구소 김정렬 소장이 와서 특강을 한다고 하여 마침 수업이 없는 날이라서 장 전 의원과 특강을 들었다. 그 즈음 경주에서 열린 여성장애인 전국 조직을 준비하는 모임에 참여, 이후 부산 여성장애인들을 모아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장향숙 전 의원이 회장을, 내가 사무국장으로 조직을 키워 갔다. 당시 나는 영어 과외 알바를 하면서 번 돈으로 조직원들과 자장면으로 식사를 하며 밤새 토론을 하고 기획안을 쓰고 지역사회 후원자를 모으고 사회 지도층을 만나며 정말 바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여성계와 유기적인 관계를 맺었던 것이 부산여성장애인연대를 단기일 내에 성장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전국 최초로 부산에 장애인성폭력상담소와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을 열어 여성장애인 인권에 앞장섰다.

Q: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된 것은 파격적이었다. 국가인권위원회 퇴임 후 거의 10년 동안은 어떻게 지냈는지.

2007년 9월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때가 40대 초반이었다. 20대를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하다가 30대는 여성장애인운동에 열정을 바치고 40대에 전문성과 책무성이 따르는 지위를 가진 것은 장애인인권운동의 결과물이자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이는 서류들을 집으로 갖고 와서 법률 사전을 찾아가며 열심히 읽으며 내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자리에 대한 평가는 나 개인에게 하는 것이 아니고 여성장애인 전체에게 돌아가는 것이기에 대학 입시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그렇게 애정을 쏟았기 때문에 인권위 위원장이 UN권고안 기능을 축소하는 등 인권을 축소 시키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인권위 문제를 지적하는 용기를 내기도 하였다.

그 후 10년, 사람들은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행이나 하면서 지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장애인복지 현장을 떠났던 적이 없다. 퇴임 후 잠시 여행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그 후 부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꾸준히 하였다.

Q: 앞으로의 목표는.

개인적으로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다음 목표가 정치 아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어떤 자리를 목표로 하지는 않았다. 그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장애인과 장애인문제를 해결하며 보다 나은 세상에서 장애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앞으로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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