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맹인전통예술단 변종혁 예술감독(왼쪽 위)와 단원들 모습.ⓒ에이블뉴스

1930년대 초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은 ‘위안부’라는 이름하에 15살 소녀의 순결을, 인생도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아픈 역사 속 그림자,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른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70년 만에 울린 이들이 있다. 소리의 울림, 이른바 ‘소울’ 하나로 였다. 그들 역시 일본에 의한 아픔을 갖고 있는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다.

세종실록 13년, ‘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생겨난 관현맹인제도. 조선시대 재능이 뛰어난 시각장애인에게 궁중 잔체 등에서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하지만 조선왕조를 지나 오랫동안 함께했던 악사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사라져야만 했다.

이후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를 다시 재현하고자 2011년 3월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을 통해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을 창단, 4년째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국내 유일 시각장애인 국악연주단이기도 하다.

변종혁(55)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모인 7명의 단원들, 그리고 4명의 예비‧연수단원들. 이들은 국내외 연간 100여회 다양한 공연활동을 통해 비장애인에게 ‘소울’을 전하고 있다. 그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울리지 않으면 청중을 울릴 수 없다”는 명목 하에 소리를 내왔다는데.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것은 수월하지 않았다. 이들 단원 하나하나의 ‘국악 첫 걸음’ 또한 눈물겹다.

지난 2013년 ‘온 나라 국악경연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던 이현아씨(27세, 시각1급)는 안마 대신 음악을 택하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맹학교에서는 안마사를 권유했지만 그녀의 꿈은 음악이었다. 새벽 2~3시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국악방송에 홀로 귀 기울이고, 국악해설을 녹음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서울맹학교 고등부 3학년 시절,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학을 가고 싶은데 시각장애 때문에 받아주는 곳이 없다. 이러다간 평생 안마를 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던 것이 계기였을까. 당시 우연히 방송을 듣게 된 중앙대 총장은 수시모집에 현아씨가 응시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다. 당당히 비장애인과의 경쟁을 뚫고 중앙대 국악과에 입학하게 된 것.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비장애인 친구들은 그녀에게 새로운 문화였다. 예쁘게 화장하고 예쁜 옷을 차려입은 친구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친구들은 그런 현아씨를 외면하지 않고 직접 메이크업도 도와주고 서울나들이도 함께했다. 현아씨의 어머니는 “너 왜 이러냐”며 걱정했지만 그녀에겐 대학은 꿈만 같던 시절이었다.

“수업을 쫓아가는 게 힘들 뿐, 비장애인 친구들과의 문제는 없었어요. 화장도 도와주고, 풀메이크업도 시켜주고 너무 신기했죠. 문제라면 책 때문에 복지관가서 파일로 만들고 했던 부분들뿐이었어요.”

반대로 거문고를 맡은 김수희씨(43세, 시각2급)의 경우는 ‘보이는 친구들'과 오랫동안 생활해왔다.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하셨던 그녀의 어머니의 권유로 처음 시작한 거문고. 그녀는 일반학교를 다니면서 비장애인으로 자랐다. ‘보이는 친구들’과 같이 공부했고, 용인대학교 국악과 석사까지 졸업했다. 그러나 문제는 졸업 후 였다.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은 정도의 장애를 갖고 있는 수희씨는 일반 국악단체에 들어가기 너무 힘들었다. 일반 국악단체의 시험은 악보를 보고 바로 연주해야 했다. 수희씨의 장애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니, 번번이 ‘탈락’. 막연하게 연주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의 벽은 너무 높았다. 방과 후 교실, 문화센터 교육을 진행하다 우연히 알게 된 관현맹인전통예술단에 2012년부터 몸담고 있다.

“시각장애인이지만 시각장애를 인식하고 살지 않아서 처음에는 단원들과의 관계가 낯설 것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분위기도 밝고 너무나 좋은 것이에요. 적응도 너무 빨리했고요.”

김덕수 사물놀이패 단원을 지낸 타악기 연주자 이진용씨(42세, 시각1급) 또한 10년간 무대에 서지 못하고 생계에 어려움으로 큰 고민에 빠졌다. 개인이 운영하는 단체다 보니 수당이 많지 않았다. 사물로만 모든 것을 걸고 싶었던 그는 결국 포기하고 점자 악보 교정일을 거쳐 안마사로 일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찾은 오디션 공고에 관현맹인전통예술단 창단 멤버가 됐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공연 모습.ⓒ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무대에 대한 간절함이 깃들었을까. 이들의 연주는 단순한 ‘시각장애인이라서’ 감동을 주지 않는다. 마음으로 전달하는 소리, 간절함을 전했다. 지난해 5월에는 음악인들의 꿈의 무대라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단독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데.

“당시 세월호 참사가 지난 지 1달 정도 된 시점이었거든요. 더 많은 감정을 실어서 관객들이 음악에 빠져들었고 호응도도 너무 좋았어요. 안 보이는 분들이라서 힐링이 아녜요. 마음에서 우러난 연주는 반드시 관객들에게 전달이 되요.”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위안부 할머니들도 찾은 그들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경기도 광주시 위안부보호시설 ‘나눔의 집’에서 국악공연을 펼친 것.

하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의 마음을 처음부터 이끌긴 힘들었다. 처음 몇 곡을 했을 때는 반응도 없었고, 시선도 끌지 못했다. 단원들은 포기하지 않고 마음의 목소리를 이끌어냈다. 마지막곡 ‘아리랑’이 흘러나오자 한분 한분 모여든 할머니들이 덩실덩실 춤까지 추게 된 것.

“이 분들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악수하면서 인사해 달라”는 변 예술감독의 말이 끝나자 “너무 예쁘다, 잘생겼다, 고맙다”란 감사의 말이 이어졌다는데. “꼭 일본에 가서도 해 달라”란 말이 단원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졌다고. “아마도 마음의 위로가 됐을 것이에요”며 변 감독은 당시를 회상했다.

시각장애인 단원들과 그들을 이끌어가는 비장애인 예술감독. 어찌 보면 불편함이 많을 것 같지만 연습할 때도 공연할 때도 어려움은 없다. 매주 수,목,금 8시간씩 이어지는 연습시간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제가 놀랐던 부분은 시각장애인이지만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문자도 하시고, 드라마 줄거리도 다 알고, 심지어 무슨 옷 입었는지 다 아시더라고요.”

“가끔 제가 멋을 부릴 때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아쉽다”는 변 예술감독에 말에 단원들의 웃음이 터지자 곧이어 그녀는 곧바로 “좋은 점은 살찌거나 부어도 티가 안 난다는 점?”이라며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지난 2012년 당시 첫 부임한 변 예술감독에게 쉽게 마음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단원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은 오는 7월 또 하나의 큰 공연을 준비 중이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에서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기여하는 축하공연이 예정돼있는 것. 마음을 다해 좋은 음악을 전하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자 목표다.

“음악을 들으면서 각박하고 어려운 시기에 힐링되셨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전통음악을 하는 시각장애인 예술단이 아니에요. 한분한분의 가락과 목소리가 합쳐져 소울을 주는 것이 목표입니다. 곧 이뤄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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