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텔링 콘서트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 공연 포스터. ⓒ춤추는 헬렌켈러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장애인 복지정책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와 국악, 시각장애인들의 춤이 결합된 히스토리텔링 콘서트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가 오는 25일 오후 7시 30분 서울 북촌창우극장 무대에 오른다.

‘세종과 지화, 춤을 추다’는 한국의 보물을 노래하는 국악 밴드 '비단'(대표 김기범)과 시각장애인 명상 예술 전문기업 '춤추는 헬렌켈러'(대표 정찬후)가 KDB대우증권의 후원을 받아 공동으로 제작했다.

일러스트레이션 기법을 활용한 다큐멘터리와 비단의 국악연주에 맞춘 시각장애인들의 춤, 역사 전문가의 실제 강연으로 구성돼 입체적인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특히 새로운 시도인 만큼 제작 과정도 남달랐다.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공개 오디션을 통해 출연진을 선발했고, 다큐멘터리의 내레이션도 시각장애인이 맡았다.

춤추는 헬렌켈러는 “훈민정음 반포 등 수 많은 업적을 남긴 세종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세종은 공연의 또 다른 주인공인 '지화'처럼 장애를 가진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보통사람들보다 특별한 재주를 가진 인재들을 중용했다. 세종이야말로 말로 시대를 앞서는 장애인 복지정책을 실천했던 진정한 성군”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번 공연을 통해 근 100년 넘게 안마사 등에 한정돼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25만 시각장애인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할 것”이라고 관심을 당부했다.

공연에 출연하는 시각장애인들은 오디션을 통해 선발됐다. 사진은 연습 전 몸을 풀고 있는 모습. ⓒ춤추는 헬렌켈러

세종과 지화 이야기

세종대왕에 대해서 모르는 사실이 한 가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가 시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는 선천적인 장애인은 아니고 재위 중에 실명하게 되는데, 즉 중도실명이었던 것이죠.

세종대왕은 안질에 걸려 시력이 점점 약해져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세종 23년(1440년)에는 눈이 보이지 않아서 정사를 돌볼 수 없다며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발표하는데 신하들이 울면서 만류했다고 세종실록에 전하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그 후에도 서너차례 보위에서 물러나겠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중도실명자였지만 그의 시각장애가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은 임금이었고, 또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서 잘 나타납니다.

세종 18년(1435년)에는 시각장애인 지화에게 종3품 벼슬을 주었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관청인 명통사에 쌀과 황두(콩)를 주어 시각장애인을 지원한 기록도 있습니다. 또한 궁중 내연에서 연주를 맡았던 관현맹인이 가장 대접을 받았던 때도 바로 세종시절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이토록 시각장애인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자신의 시각장애 때문일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세종은 지화에게 종3품을 작록할 때 이미 눈병이 나 있었다. 시각장애의 원인은 유전 질병 사고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세종의 안질이 당뇨라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튼 세종은 질병으로 눈이 나빠졌다. 그래서 세종실록에는 온천에 관한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세종은 안질을 고치려고 약도 쓰고 온천행도 여러 차례 했다. 안약을 바치거나 온천을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니 상에 욕심이 생겨 온천을 허위로 보고하는 사람도 생겼다.

그럼에도 세종의 눈병은 낫지 않아서 세자에게 전위하겠다고 했으나 신하들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들어 만류하였다. 그러자 업무를 축소하라는 전지를 내리기도 하였다.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내가 안질(眼疾)을 얻은 지 이제 10년이나 되었으므로, 마음을 편히 하여 조섭(調攝)하고자 하니, 매월의 대조회(大朝會)와 아일(衙日)의 조참(朝參)과 야인들의 숙배(肅拜)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없애게 할 것이며, 향과 축문도 친히 전하지 말게 하라.'』(국역세종실록 23/02/20/정해)

그리고 23년 4월에는 세종이 지팡이를 짚고 다녔으며 온천행을 하고 눈이 조금 나아졌다고 한다.

『도승지 조서강(趙瑞康) 등이 문안드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깔깔하며 아파, 봄부터는 음침하고 어두운 곳은 지팡이가 아니고는 걷기에 어려웠다.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도 효험을 보지 못하였더니, 어젯밤에 이르러서는 본초(本草)의 잔 주석(註釋)을 펴놓고 보았는데도 또한 볼 만하였다.'』(국역세종실록 23/04/04/경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25년(1443년) 계해 12월이고 반포는 그보다 3년 뒤인 28년(1446년) 병인 9월이다.

현대에 와서 특히 인터넷 시대에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한글이 창제되고 반포되는 시기에도 세종은 눈병을 앓고 있어 온천을 다녔는데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여러 차례 당부하였다.

『임금이 승지(承旨)들에게 이르기를, '내 두 번 온천(溫泉)에 갔었는데 민폐(民弊)가 많으므로 이제 그만두려 하였더니, 너희들이 정부 대신들로 더불어 가기를 청하고, 내 또한 다리 아픈 병이 있기에 마지못하여 가려 하니, 너희들은 나의 깊은 뜻을 알아서 폐단이 없도록 조치하라.'하였다.』(국역세종실록 25/02/28/갑인)

세종대왕이 눈병을 오래 앓았고 눈이 침침하여 어두운 곳은 지팡이 없이 다니기가 힘들었으며 눈병 치료를 위하여 온천행을 자주 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 시각장애인이었다.

현재 우리나라 장애인복지법에 시각장애인은 0.02이하 1급에서부터 0.2이하의 6급까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세종대왕은 아마도 시각장애 4~5급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세종은 천성이 어질고 부지런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취미와 재능이 여러 방면에 능통하였다. 정사를 펼침에 있어서도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의 어려움에 관심을 가져 백성을 근본으로 한 왕도 정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런 성품 탓인지 맹인들을 위한 명통사에 여러 차례 쌀과 콩 등의 재물을 하사하고 점복(占卜)을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내리는 등 특히 시각장애인에게 많은 선정을 베풀었다.

더구나 세종 18년에는 판수 지화에게 겸교 내시 작록을 내리기도 하였다.

『임금이 노한 등의 의논에 따라, 지화(池和)를 중훈 검교 첨지내시부사(中訓檢校僉知內侍府事)로 삼아 사옹원 사직의 일을 보게 하고, 이신(李信)을 조산 대부 검교 동첨지내시부사(朝散大夫檢校同僉知內侍府事)로 삼아 사옹원 부사직(司饔院副司直)의 일을 보게 하고, 곧 사모(紗帽)와 띠를 내려 주었다.』(국역세종실록 18/10/05/정묘)

검교는 종 3품으로 현대로 보자면 이사관급으로 입법부나 사법부 행정부의 국장급이다. 그런데 임금이 시각장애인에게 종 3품 벼슬을 내리자 이를 시샘하는 사람들이 파면을 상소하였으니 그 사유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에 만연하던 장애인에 대한 보편적 인식과 유사하다. 즉 병신하고 자리를 나란히 같이 한다는 것이 수치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세종은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간원 우정언(右正言) 이맹전(李孟專)이 아뢰기를, '지화와 이신에게 관작을 제수하시니, 신 등은 생각하건대, 옛날에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房玄齡)에게 이르기를, '악공(樂工)과 잡류(雜類)들은 가령 기술이 제배(輩)보다 뛰어나더라도 다만 전백(錢帛)을 특별히 내려 주어 그 재능을 상주면 될 것이며, 반드시 등급을 뛰어 넘어 관작을 주어서 조정의 현인·군자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며, 자리를 같이하고 먹게 하여, 사대부들의 수치가 되게 하지 말라.' 하였는데, 지금 지화(池和) 등은 비록 관작은 주었지마는 어찌 그 사무를 맡길 수가 있겠습니까. 또 사모와 품대 차림으로 조정의 길에 다니면서 조관과 나란히 서게 하니 진실로 불편한 일입니다. 원컨대 그 관직을 파면하고 다만 월료(月料)만 주어서 그 공을 상주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진실로 옳다. 그러나 판수이면서도 관직을 받은 것은 지금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예로부터 있었다. 또 사옹원의 관직은 공인·상인·천례(賤隸)들도 모두 받게 되었는데, 아마 모두가 그 사무를 반드시 맡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 지화 등은 모두 국가의 점치는 일과 혼인하는 일 등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어찌 그의 공이 없겠는가. 비록 사옹원의 관직을 제수하더라도 의리에 해로움은 없을 것이다.' 하였다.』(국역세종실록 18/10/05/정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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