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버엔 정상. 감동투어 여행단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저 뒤로는 나가사키항의 절경이 보이고 앞에는 넓직한 연못이 뿜어내는 분위기가 환상적이어서 나가사키에서 꼭 들러봐야 될 곳이다. ⓒ여행박사

고급 주택가는 대부분 전망 좋은 언덕에 위치해 있다. 18세기 외국상인들이 살던 서양식 주택가를 공원으로 조성한 ‘글로버엔’도 마찬가지여서 산책로를 올라가자면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목발을 짚거나 흰지팡이를 사용하는 사람 모두, 휠체어를 사용하는 사람까지 비탈길이 반가울 리 없다.

에스컬레이터형 무빙 워커가 있으니까 겁먹을 필요는 없다. 공원의 미관을 해치지 않게 오르막길에만 설치해 둔 무빙 워커는 땀흘리지 않고 정상에 오르게 해준다. 우선 꼭대기에 오른 다음, 관람 경로를 따라 내려오는 것이 한결 여유롭다. 장애인 이동표지판이 눈에 잘 띄게 세워져 있어 지시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된다.

개호형 전동휠체어를 빌릴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선 보급율이 저조하지만 개호형 전동휠체어는 휠체어를 미는 사람에게 편리하다. 나들이 나온 노인들이 많은 글로버엔에서는 인기 품목. 안내소 여직원이 비치용 4대가 모두 나갔다며 예약은 필수란다.

글로버엔은 장애인 편의시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곳이다. 장애인 이동 경로 안내표지판을 따라가면 관람이 편리하다. (왼쪽) 찬례씨는 개호형 전동휠체어를 빌려 언덕에서도 남편을 편안하게 밀어주었다.(맨 위) ⓒ

찬례씨는 "우리 집 앞을 올라오려면 이 사람 데리고 힘들거든요”라며 언덕을 가뿐하게 올라가는 이런 휠체어는 처음 봤다고 한다. 찬례씨의 남편은 20년 동안 합병증에 시달린 끝에 뇌병변장애인이 되었다. 말문이 닫힌 채 어린아이가 되어버린 형래씨는 걸을 수 있는데도 투정을 부리며 곧잘 주저앉아버린다. 찬례씨는 이번 여행을 “한 줄기 바람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집안에 갇혀 지내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견딜만한 자극이 되었다는 거다.

글로버엔에서 또 하나 신기했던 건 공원 입구에 있던 장애인용 리프트. 장애인들만 탈 수 있는 색다른 놀이기구같달까. 계단 30개를 올라갈만큼 정도의 시간이지만 케이블카를 탄 기분을 낼 수 있다. 시야를 상점 쪽으로 향하는 걸 잊지 마시길.

그래도 언덕길이 질색이라면 아예 다른 쪽 출입구를 택할 수도 있다. 새로 만들어진 일명 ‘글로버 스카이로드’라 불리는 이 길은 길다란 엘리베이터 2번만 갈아타면 글로버엔 정상과 연결된다. 지형적 고통에 시달리지 않고 단박에 글로버엔의 최고봉에 도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두 팀으로 갈라진 감동투어 여행단이 구로바엔 정상에 만났을 때, 가슴 탁 틔게 아름다운 나가사키항의 풍경이 펼쳐졌다. 고개를 돌리면 팔뚝만한 잉어가 노니는 넓직한 연못이 펼쳐지고, 푸른 바다와 연못과 하늘과… 이 경치를 몇마디 말로 어떻게 설명해줄 것인가.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되어 하나 하나 풍경을 일러주던 사람들이 고민에 빠질 법도 했다.

하우스텐보스 아트가든. 서서히 시력을 잃은 형철씨는 볼 수 없는 사람이 여행에 참여한 걸 어색해 했지만 여행에서 얻은 활력이 아니라면 이런 미소를 짓진 못했을 것이다. ⓒ여행박사

첫날 밤 만찬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형철씨는 “눈도 보이지 않는데 여행은 뭣하러 왔냐고 하시겠지만…” 이렇게 자기 소개를 시작했더랬다. 그렇지만 여행이 뭐 별거겠나. 기억의 저장고에 꾸역꾸역 쑤셔 넣더라도 지나쳐 온 곳들은 금세 흐릿해지는 것을. 눈으로 빠짐없이 본대도 결국 추억만 가슴에 남는 것. 누구나 그럴진대 형철씨가 아내와 이 공기를 호흡하고, 풍성한 화젯거리로 활기를 얻어간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여행지에선 아침밥이 달다

셋째 날은 아소산과 유후인 온천으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아침 일찍 배를 타야 해서 전날 밤은 항구에서 가까운 호텔에 묵었다.

일본여행에서 유카타를 입고 ‘가이세키’ 요리를 먹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여행으로 충전된 부옥씨는 “마산으로 돌아가 장애인 인권활동을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여행박사

일본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묘미는 유카타를 입고 일본 정식 ‘가이세키’ 요리를 맛보는 것. 상차림이 화려한 밥을 먹으며, 밤이 깊도록 장기 자랑을 하다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여행지에서 맞는 아침엔 늦잠을 자는 사람이 없다. 집에서라면 아침밥을 포기하고 뒤척일 시간에, 가방을 말끔히 꾸려 식당에 나타난 사람들. 그 지치지 않는 체력이라니! 여행지에선 금세 배가 고파진다며 아침밥을 다들 맛있게 먹었다.

우리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는 호텔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시마바라항에 도착했다. 우리가 타고 온 관광버스 1대와 리프트 미니버스 2대는 탄 사람 그대로 승선하고, 휠체어를 탄 사람들만 여객터미널의 통로를 이용해 구마모토페리를 탔다. 비행기 탑승구만큼이나 쾌적했다.

배안에는 단체여행을 하고 있는 일본 고등학생들이 들떠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들 무리에 휩쓸려 보행이 자유로운 사람들은 꼭대기 갑판에 올랐다. 재잘대는 일본어 수다에 이국에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배의 특성상 좁은 계단이 층간 이동을 가로막았지만, 휠체어 승객들도 배의 뒷부분은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넘실대는 바다 위에 커다란 배가 거친 파도를 일으키며 전진하는 것은 꽤나 역동적이었다.

1시간쯤 걸렸을까. 구마모토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계속)

*예다나 기자는 ‘장애 경력 18년’을 자랑하는 에이블뉴스 객원기자입니다.

“장애인에게 제일의 경력은 장애 그 자체”라고 말하는 예다나씨는 22세에 ‘척추혈관기형’이라는 희귀질병으로 장애인이 됐다. 병을 얻은 후 7년 동안은 병원과 대체의학을 쫓아다니는 외엔 집에 칩거하는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8년간은 장애인복지관에서 일했다. 그 동안 목발을 짚다가 휠체어를 사용하게 되는 신체 변화를 겪으며 장애 경중에 따른 시각차를 체득했다. 장애인과 관련된 기사와 정보를 챙겨보는 것이 취미라면 취미. 열 손가락으로 컴퓨터 자판을 빠르게 치다가 현재는 양손 검지만을 이용한다. 작업의 속도에서는 퇴보이지만 생각의 틀을 확장시킨 면에선 이득이라고. 잃은 것이 있으면 얻은 것도 있다고 믿는 까닭. ‘백발마녀전’을 연재한 장애인계의 유명한 필객 김효진씨와는 동명이인이라서 부득이하게 필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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