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 앞에서 열린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 기자회견, 노조는 기자회견을 통해 인사노무제도 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무효라고 주장했다.ⓒ에이블뉴스

“활동지원기관은 더 이상 신뢰와 의지의 대상이 아닌, 갑으로서 두렵고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았습니다.”

최근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 사무실에 A4용지 2장으로 쓰인 빡빡한 호소문이 도착했다. 6년차 부산지역 남성 활동보조인 A씨가 고민 끝에 써내려간 문장 하나하나에는 비참한 현실이 그대로 녹아있다.

“저는 6년 동안 활동보조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성실하게 일을 해왔습니다. 몸이 아프고 피곤해도 무단결근 한 번 해본 일이 없습니다. 지각 한 번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달려왔습니다. 앞으로, 근로조건이 향상되고 개선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기관과의 작은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월 80만원의 낮은 임금도, 고용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이용자의 까다로운 요구도 감수했다. 다른 일자리를 찾기 힘든 상황에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참아야만 했다. 그런 A씨가 절절한 호소를 하게 된 건, 최근 기관이 요구한 ‘인사노무제도 운영에 관한 합의서’ 때문이다.

합의서에는 유급휴일에 근로하는 것을 대신해 3개월간 범위 내 다른 근로일로 휴일을 대체할 수 있는 휴일대체제도의 운영, 연차유급휴가일을 갈음해 현금지급 또는 특정한 근로일에 근로자를 휴무시킬 수 있는 연차유급휴가의 대체제도 운영, 연차휴가 미사용 수당, 근로자의 날 수당 등 법정수당에 대해 진정 및 민형사상 이의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임금채권 합의 등을 담고 있었다.

휴일근무수당, 연차유급휴가를 의식한 기관의 재빠른 대처였다. 근로기준법 제62조에서는 개별 합의가 아닌,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를 요건으로 하고 있으므로, 이는 해당사항이 되지 않았다.

김현민 노무사는 “근로자 대표가 아닌 개개인에 대한 합의서는 근로기준법상 효력이 없다. 활동지원제도상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는 부분을 피해나가려고 하는 얄팍한 문제”라며 “기관이 드민 합의서는 모두 무효”라고 말했다.

(왼쪽)활동지원기관이 사인을 강요하고 있는 ‘인사노무제도 운영에 관한 합의서’(오른쪽)활보노조가 합의서 무효 이유가 담긴 선전물을 배포하고 있다.ⓒ에이블뉴스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장애인 이용자의 인권보장과 자립생활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서 서두는 “을은…자유로운 의사로 날인하였음을 확인한다”고 명시됐다. 자유로운 의사는 기어코 아니었다. 노무사를 입회시켜 강요를 당한 것, ‘갑’의 힘이 이리 무서울 줄 A씨는 몰랐다. 불이익 당할까 두려워 조용히 도장을 찍었다. ‘을’로서 비참하고 슬펐다.

“합의서를 제출하고 난 심정은 노동권 박탈감과 임금체불이라는 불이익 앞에서도 갑의 눈치를 보고 있어야 하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복지부의 낮은 급여 책정에 이어 정신적, 육체적 모든 권리를 기관에게 착복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를 빼앗긴 비참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현재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이 확인한 합의서 강요 기관은 서울2곳, 경기2곳, A씨가 속한 부산1곳이다. 합의서 내용은 기관명을 제외하고 모두 동일했다. 이는 전국적으로 기관간 공유되고 있다는 현실을 가늠할 수 있다. 합의서에 서명하고 있는 활동보조인 수는 앞으로도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

이에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은 9일 서울고용노동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인사노무제도 운영에 관한 합의서’는 무효임을 주장했다.

전덕규 교육선전부장은 “인간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는 생각이 문득 든다. 합의서에는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합의했다고 적혀있지만, 실제로 활동보조인들은 기관으로부터 ‘서명을 왜 내놓지 않느냐’는 압박을 받고 있다”며 “합의서는 법적으로 무효다. 기관은 노동권을 축소하지 않고 제도 개선을 위해 함께 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은 합의서를 강요하는 행위가 이어질시 기관들을 상대로 노동법 위반으로 고발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을 해나갈 계획이다.

전국활동보조인노동조합 전덕규 교육선전부장.ⓒ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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