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실례가 될지 모르지만, 형제들과는 잘 지내고 있나요?”

며칠 전,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열차에서 옆자리 승객이 질문을 던졌다. 그는 내가 열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니 몸이 불편한 것 같아 보였다며, 형제가 있는지를 물었었고, 별 생각 없이 “누나만 두 사람 있다”고 얘기한 다음이었다.

‘이 사람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런 얘기를 할까?’

어렸을 때부터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나는,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말을 듣는 경우가 많다. “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느냐”는 말은 기본이고, “어느 지역에 가면, 당신 같은 사람에게 좋은 약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등, 대부분 반갑지 않은 손님들이다. 그런데 “형제들과 잘 지내고 있느냐”고 질문을 한 경우, 질문자의 가족이나 친지, 혹은 누군가가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거나, 장애인 자녀와 비장애인 형제 사이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혹시 주변에 몸이 불편한 분이 있으세요?”

내 말에 그는 열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잠시 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아들이 둘인데, 작은애가 몸이 불편해요. 근데 큰놈이 둘째를 그렇게 싫어하고 미워해요. 동생이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이 싫다고 하고, 그래서인지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오는걸 못 봤거든. 그래서 둘이 사이가 아주 좋지 않은데, 그쪽도 형제가 있다길래 어떤가 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사춘기를 지난 이후, 나의 몸 때문에 집안에서 사소한 다툼은 있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어봐야 할 만큼 심각한 일은 없었다. 궁금증이 생겨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올해 10살인 작은 작은 아들이 7년 전 소아마비 진단을 받은 후부터 아이의 어머니는, 다섯 살 위의 큰형과 지내는 시간보다 둘째 아이와 함께 복지관이나 병원 등을 다니며 물리치료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제대로 걷지 못하는 아이와 함께 복지관이나 병원의 예약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어머니의 등에 업는 것 말고는 빨리 이동할 방법이 없었다. 등에는 아이를 업고, 비가 오면 우산을 받쳐 들고 매일 이동을 하다 보니, 집에 돌아오면, 큰아들과 제대로 애기도 하지 못하고 지쳐서 앉아있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어머니가 동생과 함께 병원과 물리치료실을 다니는 동안, 집에 돌아와도 엄마가 없었던 큰 아이는 학원에 다녀오는 시간을 빼면 집에서 컴퓨터를 하거나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어머니가 집에 돌아와도 집에 있었던 큰아이에게는 “학원은 잘 다녀왔니? 숙제는 다 했어? 엄마 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가 대화의 전부였단다.

그렇게 늘 혼자이다시피 지내는 아이에게 안쓰러움을 느끼면서도 “큰아이는 장애가 아니니까 혼자서 할 수 있잖아”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거의 매일을 엄마 없이 지내면서도 별다른 말없이 참아주는 아들에게 안도감을 느끼며 둘째의 치료에만 전념하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않았던 문제가 생겼다. 그동안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큰아이가, 모든 것을 동생에게만 집중하는 부모의 태도에 반항하기 시작했던 것.

“언제인지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지 어머니가 한번 안아줬더니 밀쳐내면서 ‘엄마 갑자기 왜 그래? 엄마는 내 엄마 아니잖아’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많이 아팠지만, 그래도 형이니까 동생을 이해해 줬으면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안 되니 답답했던 거죠. 아버지 된 입장에서는.”

조용한 열차 안에서 나지막한 한숨 속에 그의 고민을 담은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사실 나도 그렇고 우리 집사람도 그렇고 큰애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 취급하며 키웠다고 해도 될 거에요. 먹을 것 하나 있어도 몸이 아픈 애가 먼저였어요. 성치 않은 몸에 먹을거라도 좋은 걸 먹여야겠다 싶어서. 그리고 밖에 나가기도 힘들고, 어렵게 나가도 애들이 놀리기만 하니까 큰애가 문방구에만 가도 동생을 데리고 가라고 애기하곤 했어요.”

계속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계속하는 그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어린시절 역시 앞서 들었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누나들 역시 “아들만 챙긴다”는 불만을 늘어놓는 일이 많았었고, “동생이 아프니까 너희들이 양보해라”는 말은, 청소년기 때 “공부 열심히 해라”라는 말과 함께 어머니의 단골 레퍼토리였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조금씩 서운한 감정이 생긴다는 것이 누나들의 공통된 얘기였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각을 잘못했던 것 같아요. 몸이 아픈 아이도 내 아이고 건강한 아이도 내 아이인데, 왜 그랬는지. 막내 못지않게 그녀석도 똑같이 부모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내 자식이었는데 말이에요.”

언젠가 내 어머니는 나와 누나들을 모두 모이게 한 후, “너희 세 녀석 모두 내 자식인데 그동안 미안했다”고 얘기를 했었다. 달리는 열차 안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그때 “미안하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나에게만 집중되었던 관심, 건강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던 누나들에 대한 미안함이었음을 말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종착역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릴 준비를 하며 다시 그의 얼굴을 보니 아버지로서의 깊은 고민이 보였다. 그의 표정은 오래전 내 어머니가 지었던 표정일 수도 있고, 지금도 많은 부모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이제 곧 추석이다. 장애인 형제를 둔 가족이 함께 고향에 가는 이들이 있다면 형이나 누나에게 “동생 잘 보살펴 줘라”는 말 대신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해 주는 것은 어떨까 싶다. “너희들의 시간을 즐길 권리가 있고, 너희들의 마음이 여유로워야 엄마 아빠의 마음도 행복하다”고 말이다.

*이 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서 살고 있는 독자인 정현석씨가 보내온 기고문입니다. 에이블뉴스는 언제나 애독자 여러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편집국(02-792-7785)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도록 기고 회원 등록을 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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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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