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20년 넘은 낡은 장애인등편의법 전면 개정하라’ 피켓이 전동휠체어에 걸린 모습. ⓒ에이블뉴스 DB

장애계가 편의점과 카페 등 기본적인 생활편의시설조차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장애인의 차별상황이 국가의 책임임을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의 판결을 규탄했다.

지난 2월 1심 판결에서 재판부가 사적기업에 대해서는 편의시설 설치를 구체적으로 주문하는 한편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이어 이번 2심 판결에서도 끝내 대한민국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는 6일 휠체어 사용 장애인 김명학 씨 등 4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공중이용시설 접근 및 이용에 대한 국가배상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장애인 등에게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는 대상 시설의 범위에서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규정하는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제정하는 자체가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하는 차별행위 유형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책임에 대해서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시한 권고안으로부터 곧바로 대한민국의 편의시설 설치 대상 시설에 대한 편의시설, 바닥면적을 고려하지 않아야할 의무가 도출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의와 과실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2018년 4월 11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 6개 단체는 “1층에 있는 공중이용시설은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며 법정 소송을 제기했다.ⓒ에이블뉴스DB

1998년 시행된 장애인등편의법은 바닥면적 300제곱미터(약 90평) 이상인 이용시설에만 편의시설이 설치하도록 규정했다.

올해 4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일부개정령안이 의결됐지만, 바닥면적 기준을 50제곱미터(약 15평) 이상으로 개정하고 시행일부터 신축·증축(별동 증축)·개축(전부 개축)·재축되는 곳에만 제한적으로 적용키로 해 장애계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이하 장추련)와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등은 2018년 4월 11일 편의점‧호텔‧카페 등을 운영하는 GS리테일·호텔신라·투썸플레이스와 대한민국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구체적으로 장애인등편의법 등 관련 법률이 있음에도 휠체어 사용 장애인 등이 턱에 가로막혀 편의점과 카페 등 기본적인 생활편의시설에 접근할 수 없어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 헌법상 행복추구권 등이 침해됐다는 이유다.

소송 제기 이후 2020년 2월 호텔신라와 투썸플레이스와는 강제조정이 성립됐고, 이의신청서를 접수한 GS리테일도 2022년 2월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접근로 등 편의시설을 설치하거나 이동식 경사로 구비, 호출벨 설치 등의 대안을 마련하라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판결을 수용했다.

4년여의 소송 끝에 1심 재판부가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편의점을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차별행위’임을 인정하고, 편의시설 설치 명령을 내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1심 판결은 몇몇 사적기업들의 편의시설 설치에 대한 의무를 확인하고 변화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장애인의 접근권을 외면한 채 차별상황을 묵인하고 잘못된 법체계와 시행령으로 장애인의 차별을 가중시키고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어떠한 법적 책임도 묻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6일 오전 11시 ‘공중이용시설 접근 및 이용에 대한 국가배상소송’ 선고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사단법인 두루 정다혜 변호사.ⓒ에이블뉴스

이에 원고는 가장 큰 의무와 책임이 있음에도 오히려 재판 결과를 책임회피의 명분으로 삼으며 아무런 반성도 고민도 하지 않은 대한민국에 책임을 묻고자 항소를 제기했지만, 2심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이날 선고 직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단법인 두루 정다혜 변호사는 “법원의 판단만이 국가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에 대해 재판부가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매우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이어 “오늘 재판부는 대한민국이 시행령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고의와 과실이 인정되기 어렵다고 했지만, 대한민국에게는 명백한 고의와 과실이 인정된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가입하고 2014년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로부터 바닥면적 기준에 대한 권고를 받았고 조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시설이 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피해가는 지 파악하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을 개정하지 않았고 최근 개정에서도 불합리한 바닥면적 규정을 유지했다는 것.

정 변호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고의와 과실이 없다고 판단한 재판부가 정당하게 옳은 판단을 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규탄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인단체는 6일 오전 11시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공중이용시설 접근 및 이용에 대한 국가배상소송’ 기각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에이블뉴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김영연 간사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오빠와 외출을 하기 위해서 나는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식당 등을 물색하고 리스트를 작성해야만 한다”며 “전화를 해보면 대부분 휠체어가 접근이 불가능하고, 그들은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당당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오늘 판결을 기다리며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닥면적 300제곱미터 이상인 공중이용시설에만 편의시설 의무가 있는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이 무효라고 판단한 1심 재판부보다 더 후퇴한 판결에 실망을 감출 수 없다”고 꼬집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핑계로, 사회적 합의를 이유로 계속 기다리라고 하지만, 법이 바뀌어야 인식도 바뀐다. 비열하게 면적기준 숫자놀이를 하며 방벽을 남겨두지 말라”고 강조했다.

소송 원고인 노들장애인야학 김명학 교장은 “흔히 법은 정의롭다고 하지만, 장애인들이 편의시설이 없어서 식당이나 편의점도 이용하지 못하는 현실을 방관하는 오늘의 재판을 보면 법은 정의롭지 않은 것 같다”며, “기업에만 책임이 있고 국가는 책임이 없다는 재판부는 각성하라”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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