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 김동옥씨와 조력인이 투표를 마친 후, 투표함에 용지를 넣고 있다.ⓒ에이블뉴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7일 오전 11시 20분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제1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발달장애인 10여명이 30여분만에 모두 투표하기 미션을 ‘성공’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기본권리를 ‘미션’, ‘성공’이라고 표현했느냐고요? 발달장애인은 장애 특성상 투표 보조가 필요하지만, 번번이 투표장에서 “절대 안 된다”면서 거부당해왔습니다. 공직선거법상 시각 및 신체장애로 인해 기표행위가 어려울 때만 투표보조 동반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계는 “혼자 투표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에게 투표지원을 해야 한다”고 법 개정을 요구해왔지만, 현재로서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매뉴얼에만 기대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마저도 각 투표소에서 일하는 선거사무원들의 재량대로 진행되고 있어 가족과 투표하지 못한 채 돌아서야 하는 사례들도 많았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장추련)가 올해 3월 제20대 대통령선거에서 참정권 차별 사례를 접수받은 결과, 총 63건 중 15건이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차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날 사전투표에서도 발달장애인 대부분 투표 보조가 거부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던 거죠.

사전투표소 인근에서 투표방법을 설명해주고 있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이승헌 활동가.ⓒ에이블뉴스

취재진의 카메라와 함께 투표소에 입장한 발달장애인 10여명은 걱정과는 달리, 모두 투표 보조에 성공했습니다. 일부 발달장애인에게 ‘가족이 아니면 투표 참관인 입회하에 들어가야 한다’고 요구하긴 했지만, 이는 그저 재량사항에 불과했습니다.

김동옥 씨(남, 27세)는 참관인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조력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 투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후보와 정당을 하나하나 구두로 설명해주고, 7장의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데 8분이나 걸렸습니다. 첫 투표지원을 받은 동옥 씨는 투표소에서 나오자마자 만족스럽다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제1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하는 발달장애인들.ⓒ에이블뉴스

소형민 씨(남, 27세)와 박경인 씨(여, 29세)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조력인의 도움이 아닌 혼자 투표를 마쳤습니다. 선거 전 투표 교육과 모의투표 체험이 큰 도움이 됐다고 했습니다. 관외 선거인이라 기표 후 회송용 봉투에 투표용지에 넣느라 애를 먹었지만, 투표 행위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많은 발달장애인이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전교육 및 설명회나, 모의투표 체험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참관인이 멀찍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조력인과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 투표를 하는 모습.ⓒ에이블뉴스

하지만 발달장애인의 참정권이 100% 보장됐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날 투표에는 많은 취재진이 투표 장면을 담기 위해 동행했기 때문에 거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겁니다.

장추련에 따르면, 선관위는 최근 각급선거관리위원회에 ‘인지기능이 부족하거나 후보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 투표 보조가 불가하다는 추가 안내 조치를 내렸습니다. 아마 개별적으로 가족과 함께 투표소를 방문한 발달장애인들은 투표 보조 지원을 거부당하는 사례가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이날 ‘성공’이라고 표현한 자체가 너무나 씁쓸했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6월 2일까지 참정권 차별 사례를 접수받을 예정입니다.(구글링크 https://forms.gle/TGBHWQid4A3f4My8A)

시각장애인을 위해 선거공보물 텍스트를 USB에 담아 제공하는 디지털 파일.ⓒ에이블뉴스

시각장애인도 예외는 아닙니다.집마다 발송되는 선거공보물을 제대로 읽을 수 없기 때문인데요. 2020년 시각장애인 점자공보물 매수를 2배까지 확대하는 것으로 법이 일부 개정되었지만 아직 부족합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점자공보물 매수가 기본적으로 묵자 3배 이상 돼야 한다고 합니다.

텍스트를 USB에 담아 제공하는 디지털 파일 제공도 의무가 아니다 보니, 후보들 간 제공이 ‘들쭉날쭉’합니다. 장추련 이승헌 활동가가 지난 26일 기준, 모니터링 결과, 서울시장 후보 5명 중 권수정 후보를 제외한 4명(송영길, 오세훈, 신지혜, 김광종) 후보가 제출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파일 종류와 방식이 한글파일, 텍스트문서 파일 등 제각각 이다 보니, 정보 접근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곽남희 활동가는 ‘한숨’을 푹 내쉽니다. “2년 뒤에 또 선거가 있다고 하는데, 디지털 파일 종류가 같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점자공보물을 묵자의 3배로 확대해야 하고요.”

제20대 대통령선거 당시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에 위치한 사전투표소. 휠체어 사용 장애인은 입구 앞에서 ‘길거리 투표’를 해야 한다.ⓒ에이블뉴스DB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한 투표소 접근권도 ‘첩첩산중’입니다. 공직선거법상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을 위해 1층에 투표소를 마련해야 하지만, 적절한 장소가 없으면 예외로 둘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90% 이상 투표소 접근을 보장했다고 해도 여전히 접근조차 못 하는 투표소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대선에서도 엘리베이터가 없는 3층에 투표소를 마련해 장애인은 밖에 덩그러니 마련된 임시기표소를 이용하는 ‘길거리 투표’ 굴욕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장추련 박김영희 상임대표는 “영등포나 봉천동, 종로에 가면 대부분 옛날 건물이라서 임시기표대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직접 투표함에 넣지 못해 불안한 마음이 크다”고 말했습니다.

선관위는 이번 지방선거에서 임시기표소에서 투표할 시 투표용지를 담을 봉투와 투명한 이동투표함을 선보였지만, 이 또한 무용지물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내 투표용지가 제대로 투표함에 들어가는지 확인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임시기표대가 아니라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투표소를 설치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이 27일 사전투표에 앞서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 건너편 전쟁기념관 앞에서 “참정권을 보장해달라”며 기자회견을 개최했다.ⓒ에이블뉴스

장추련 등은 이날 사전투표에 앞서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 건너편 전쟁기념관 앞에서 “참정권을 보장해달라”며 기자회견을 개최했습니다. 참정권에서 여전히 장애인들이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알리는 ‘가오나시 유령 퍼포먼스’도 펼쳤습니다. 이번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릅니다. 참정권 기자회견,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그리고 선관위 항의방문. 이 일정을 선거 때마다 반복해오고 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고 합니다.

사전투표 날 더는 기자회견이 아닌, 개별적으로 투표소로 갈 수 있도록 기본적인 권리 ‘참정권’이 보장돼야 하지 않을까요? 2년 뒤인 2024년 국회의원선거에는 ‘참정권 보장’ 기자회견이 열리지 않길 바랍니다.

장애인들이 배제되고 있는 현실을 알리는 ‘가오나시 유령 퍼포먼스’ 모습.ⓒ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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