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중앙지방법원 전경.ⓒ에이블뉴스

제20대 대통령선거(3월 9일)를 앞두고,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지원을 둔 법정 다툼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발달장애인 측은 “혼자 투표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에게 투표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정부 측은 “보호자의 의사에 따라 투표할 위험성이 높다”며 자기결정권으로 맞섰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0민사부(부장판사 송경근)는 14일 발달장애인 박 모 씨가 정부(대한민국)를 상대로 제기한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지원 임시조치 신청 심문기일을 진행했다.

가오나시 가면을 쓴 채 ‘발달장애인도 대한민국 유권자다’ 피켓을 들고 있는 활동가.ⓒ에이블뉴스DB

■발달장애인 투표지원 ‘삭제’, 투표권 박탈 우수수

임시조치를 신청한 30대 발달장애인 박 씨는 2021년 4월 7일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당시, 여느 때와 같이 어머니의 조력을 받아 투표하려 했지만, 투표소 직원으로부터 조력을 제지당했다.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면서 공직선거법상 투표지원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공직선거법 제157조 제6항에 따르면 시각 또는 신체장애로 인해 혼자서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해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발달장애인은 이동이나 손 사용에 어려움이 없다는 이유로 지원이 필요한 신체장애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장애인단체들은 발달장애인 당사자 참정권 보장 강화를 위해 ‘투표소 안에서의 투표지원’을 요구했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중앙선관위)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2016년 20대 총선부터 선거매뉴얼에 신체장애 외 ‘발달장애’도 투표 보조를 받을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중앙선관위가 장애인단체와의 사전 논의 없이 돌연 2020년 4월 제21대 총선부터 해당 매뉴얼을 삭제하며 문제가 발생한 것. 매뉴얼이 삭제된 사실을 몰랐던 12명의 발달장애인은 곧바로 “참정권을 박탈당했다”면서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에 차별 진정을 제기했다.

인권위 또한 다음 해인 2021년 3월 26일, 중앙선관위에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한 정당한 편의 제공 방안을 마련하라고 권고 내린 바 있다.

결국 당사자 박 씨는 2시간 동안의 실랑이 끝에 기표소에 혼자 남겨졌으며, 제대로 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투표소를 나서야만 했다. 사단법인 두루 이주언 변호사는 “투표를 했는지, 안 했는지 조차 알 수 없다”고 전했다.

2021년 11월 29일 20대 대선을 100일 앞두고,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6개 단체가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발달장애인 투표 보조 지원 법원 임시조치 신청’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에이블뉴스DB

■인권위 권고에도 묵묵, 임시조치·국민청원까지

중앙선관위는 인권위의 시정 권고 이후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볼 수 없는 발달장애인과 장애인단체는 “또 투표권을 박탈당할 수 없다”면서 지난해 11월, 법원에 다시 발달장애인도 투표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지침을 되돌려 놓으라는 임시조치 신청을 법원에 제출했다.

장애인차별금지법 제48조 제1항에 따르면, 법원은 본안 판결 전까지 차별행위를 중지하는 임시조치를 명할 권한이 있다.

14일 재판에 앞서 장애계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통해 ‘20만 발달장애인도 대통령을 뽑고싶다! 투표보조를 지원하라’는 게시글을 올려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보장에 관한 관심을 호소했다. 현재까지 2167명이 참여한 상태로, 오는 2월 9일까지 진행된다.(링크주소: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603669)

14일 재판 진행 후, 법률대리인들이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에게 재판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다.ⓒ에이블뉴스

■“걸어갈 수 있으니 가능? 투표소 방치 국가폭력”

이날 재판은 신청 당사자인 발달장애인 박 씨 측 대리인과 정부 측 대리인이 모두 자리해 팽팽한 법정 다툼을 펼쳤다. 박 씨 측은 “혼자 투표할 수 없는 발달장애인에게 투표보조원 지원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반면, 정부 측에서는 ‘비밀투표’와 ‘자기결정권’으로 맞섰다.

박 씨 측은 재판부에 서면으로 ‘인권위는 발달장애인 선거인이 공적보조인을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고 권고를 내렸지만, 중앙선관위는 지침을 수정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선거에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면서 ‘당사자는 기표소의 좁은 공간에 혼자 있을 경우 과다한 손 떨림이 생겨 보조원 배치 등 정당한 편의제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유엔장애인권리협약 등을 내세웠다.

박 씨 측 대리인은 “정부에서는 1만여 개 투표소, 20만 명의 발달장애인 유권자를 일일이 확인해 혼자 기표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직원이 판단해보겠다고 하는데 적절한 처사인지 의문”이라면서 “발달장애인도 국가기관에서도 중증장애인 판정을 내린 장애인이다. 제도와 특정 후보자, 투표행위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과도한 손 떨림으로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기표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함부로 지원을 박탈해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장애인 스스로 보조원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음에도 앞으로 걸어갈 수 있으니 투표하도록 방치하고 투표소에 2시간 머물도록 하는 것은 국가의 폭력”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정부 “자기결정권 침해”…“역할 한정하면 된다” 맞짱

반면, 정부 측은 이미 발달장애인 참정권을 위해 알기 쉬운 책자 및 애니메이션 배포, 선거 관련 자료 제작, 교육 시행 등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다며 “차별이 아니다”라고 전제하며, ‘본인의 의사보다는 보조자의 의사에 따라 투표할 위험성이 높다’고 맞섰다. ‘투표보조제도는 필연적으로 비밀을 침해하기 때문에 예외적 상황에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것.

구체적으로 ‘낯선 환경으로 인한 두려움’은 얼마든지 현재 매뉴얼로 가능한 부분이며, ‘투표방법을 모르는 경우’, ‘누구에게 투표할지 모르는 경우’로 인해 투표지원이 필요한 대상자에 대한 지원은 선거 전까지 보완책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정부 측 대리인은 “비밀투표 원칙은 최대한 존중돼야 하고,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도 장애인은 보호 주체가 아닌 자기결정권 주체로 언급하고 있다. 이 틀에서 한 표 행사 가치를 ‘보조’라는 일반적인 가치로 누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쌍방 모두 의견을 청취한 재판부는 박 씨 측에 정부 측이 주장한 ‘자기결정권 침해 위험성’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박 씨 측은 “보조원을 반드시 친분 관계가 있는 부모님으로 정해달라는 것은 아니다. 누가 됐든 보조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면 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자기결정권을 침해되지 않도록 절차와 기표행위 보조의 역할로 한정해 해결할 문제지, 선거 참여 권리까지 박탈하면서까지 자기결정권을 제기할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재판부는 양측 대리인으로부터 서면 추가 내용을 제출받아 검토한 뒤, 짧은 기간 내 임시조치 결정을 내릴 계획이다. 보통 2주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애계는 임시조치 신청과 더불어 오는 18일 본안 소송도 시작한다. “발달장애인이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물과 그림투표용지를 제공하라”며 법원에 차별구제청구소송을 제기할 예정이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