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평구청 키오스크 접근성을 조사하는 시각장애인 이진용씨. 이어폰을 꽂아도 음성안내로 넘어가지 않아 ‘먹통’이었다.ⓒ에이블뉴스

“어? 소리가 안 나와요.”

시작부터 난관에 빠졌습니다. 은평구청 1층 로비에 위치한 키오스크(무인민원발급기)에서 장애인증명서를 발급받으려던 중증시각장애인 이진용(45세, 남)씨가 손으로 더듬더듬 이어폰 소켓에 이어폰을 꽂았지만, 소리가 먹통입니다.

이어폰을 꽂고 시각장애인용 점자 키패드를 통해 ‘시작’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시각장애인용 모드로 넘어가야 하지만, 이마저도 되지 않습니다. “뭐야!” 손으로 더듬더듬 기계를 만져보는데, 점자가 있어야 할 공간에 떡하니 묵자로 된 안내문까지 붙어있습니다.

키오스크 점자 위에 안내문이 ‘떡하니’.ⓒ에이블뉴스

“안내문 붙일 곳도 많은데, 왜 점자 위에 해놨죠? 시각장애인 무시하는 거죠.” 진용 씨가 무인민원발급기 앞에서 한참 끙끙대자, 로비에 있던 직원이 달려와 대신 화면을 터치하며 도와줍니다.

“쓰시는 장애인분들이 거의 없는데…”

“많이 없다고 작동 안 되면 되나요? 쓸 수가 없잖아요.”

지난 16일 기자는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실시하고 있는 ‘시각장애 접근성 모니터링 활동’에 동행했습니다. 서울형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사업 일환으로 시각장애 당사자 4명이 지난 4월부터 서울시 25개 자치구의 공공기관 키오스크의 실태를 점검하고 있는데요.

이날 함께 간 이진용 씨와 그의 근로지원인 박향아 씨(여)는 은평구청과 은평세무서를 각각 방문해 키오스크 이용실태를 모니터링했습니다. 진용 씨는 형체 정도만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중증 시각장애를 가졌으며, 음성안내와 점자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공공기관에 비치된 키오스크는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도록 한 점자 키패드, 음성안내 기능을 위한 이어폰 소켓 등이 마련돼 있는데요. 어찌 된 일인지 기계마다 제각각입니다.

은평세무서 키오스크. 신식모델로 시각장애인 접근성이 비교적 잘 갖춰진 편이었다.ⓒ에이블뉴스

먼저 방문했던 은평세무서의 키오스크는 딱 봐도 신식모델입니다. 진용 씨가 키오스크 앞에 다가서자 자연스럽게 안내 음성이 흘러나옵니다. 바로 가방 안에서 이어폰을 꺼내, 손으로 더듬더듬 이어폰을 꽂을 수 있는 소켓을 찾습니다. 소켓에 이어폰을 꽂자 바로 음성안내서비스로 넘어가며 2분도 채 안 돼 ‘장애인증명서’ 발급에 성공!

은평세무서 키오스크를 통해 장애인증명서 발급에 성공한 이진용씨.ⓒ에이블뉴스

“음성 소리도 크고 이용도 편리한데요?” 발급된 장애인증명서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는 진용 씨, 다만 아쉬운 점은 이어폰 소켓이 못으로 찍힌 것처럼 함몰돼 있어 손으로 찾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제가 모니터링을 많이 해서 그렇지, 그냥 모르면 지나치는 경우가 많거든요. 약간 넓고 돌출돼 있으면 찾기 쉬울 것 같아요.”

(위)은평구청 키오스크를 점검하러 들어가는 이진용씨와 그의 근로지원인(아래)은평구청 1층 로비에 있는 키오스크 모습.ⓒ에이블뉴스

이어 찾아간 은평구청의 키오스크는 겉으로만 봐도 오래된 모델입니다. 이어폰 소켓에 이어폰을 꽂아도 음성안내 서비스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박향아 근로지원인이 바로 체크리스트를 꺼내 총 25개 문항 중 17개 문항에 X 표지를 쳤습니다. 음성안내 영역에서는 이어폰 단자가 제공되는 것 외에는 모두 X 표지였습니다.

공공키오스크 체크리스트.ⓒ에이블뉴스

‘시각장애인 모드로 변경 가능한가?’ (X)

‘이어폰을 연결하면 스피커음이 차단되는가?’ (X)

‘음성정보를 이용해서 디스플레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가’ (X)

‘이어폰의 음성 크기가 적당한가’ (X)

‘사용자가 음량 조절을 할 수 있도록 방법이 제공되어 있는가?’ (X)

단지 점자 키패드와 이어폰 단자가 있을 뿐, 시각장애인이 활용할 수 없는 ‘그림의 떡’인 셈입니다. 점자 키패드마저도 점자가 돌출이 잘 안 돼 읽기가 어렵습니다. 진용 씨는 “아스팔트 껌딱지 같다. 읽는 둥 마는 둥”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이진용씨는 모니터링 후 은평구청 민원여권과로 가서 키오스크의 문제점을 설명하며 개선을 요청했다.ⓒ에이블뉴스

이날 점검 후, 진용 씨는 은평구청 민원여권과로 가서 직원에게 이 같은 키오스크 문제점을 설명하며, 향후 개선을 요청했습니다.

키오스크는 최저임금 상승과 코로나19로 인해 빠르게 보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용 씨와 같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마치 ‘유리벽’과 같습니다.

이날 점검했던 공공 키오스크의 경우 어느 정도 갖춰져 있지만, 식당, 카페 등에 설치된 민간 키오스크는 음성안내 기능이 전혀 없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시각화된 정보 앞에서 시각장애인은 도움을 요청할 누군가를 기다릴 뿐입니다.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가 앞 사람이 주문하다 만 것까지 함께 결제하는 웃지 못 할 사연도 많습니다.

“얼마 전에 핸드폰을 파는 언택트스토어를 다녀왔는데, 키오스크로 핸드폰을 고르고, 요금제를 선택하면 자판기로 바로 나온대요. 근데 저는 전혀 쓸 수가 없더라고요. 비장애인 고객들은 편하게 고를 수 있어 좋다고 하지만, 우리는 점점 시대에 뒤처져 가는 거죠.”

그런 진용 씨는 공공부터 키오스크의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면 민간 또한 높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올해 말까지 진행되는 모니터링에도 끝까지 참여하겠다는 계획입니다.

“공공이 바뀌면 민간도 바뀔 것 아니에요.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시각장애인도 쓸 수 있도록 민간 키오스크에 음성안내 서비스가 갖춰져서 먹고 싶은 것을 천천히 고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남정한 센터장.ⓒ에이블뉴스

한편,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지난해 12월 청와대 홈페이지를 통해 ‘키오스크 때문에 일상의 단절을 겪고 있는 시각장애인의 호소를 들어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설계로 시각장애인을 배제하는 것은 ‘차별’이라며, 키오스크의 접근성 설비를 의무적으로 완비하도록 해달라는 호소였습니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 남정한 센터장은 “키오스크 접근성 관련 법 개정안이 여러 차례 발의됐지만, 실제로 본회의를 통과한 내용이 없다”면서 “키오스크에 음성안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로 돼야 하고, 기기 도입 시기부터 시각장애인이 참여해 접근성이 함께 논의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실로암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키오스크 접근성 모니터링 결과에 따라 공익소송을 진행할 계획입니다.

‘이 망할 놈의 키오스크!’ 키오스크를 바라보는 이진용씨.ⓒ에이블뉴스

앞서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장애인의 키오스크 정보 접근성을 보장한 제품을 우선구매하는 내용이 담긴 ‘지능정보화 기본법’ 시행령에 들어갔습니다. 또 장애인의 키오스크 이용 편의 제고를 위한 ‘장애인차별금지법’ 개정안도 국회 상임위 문턱을 넘어 본회의 통과를 앞두고 있습니다.

언택트 흐름 속 소외된 시각장애인도 키오스크로 햄버거를 주문할 날이 언제쯤 올까요? 일상의 권리를 침해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절대 묻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키오스크의 음성안내서비스를 위한 이어폰 소켓. 돌출형이 아닌 함몰돼 있어 시각장애인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구조다.ⓒ에이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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