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의 섬에서 염전 근로자로 일했던 지적장애인들이 10년이 넘도록 임금을 받지 못하고 폭행을 당하는 등 인권침해를 당했다. 이 같은 충격적인 사실은 지난 2014년 ‘신안군 염전노예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피해자들은 국가와 지자체를 상대로 소속 공무원의 부작위로 인한 위자료 지급을 청구했다.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국가와 지자체의 손을 들어줬다. 비장애인과 달리 장애인의 삶은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결정할 수 있다는 인식이 만든 결과였다.

그러나 항소심 판결을 달랐다. 해당 지역 경찰공무원 또는 근로감독관, 지자체 사회복지 담당 공무원들이 착취를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고 판단해 국가의 위자료 지급 책임을 인정했다.

국가와 지자체가 상고했지만 올해 대법원은 원심 판결이 법 위반 등의 특정한 사유가 없다면서 더 심리하지 않고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렸다. 피해자들이 3년 5개월 만에 국가배상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이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11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2019년 장애인인권 디딤돌 걸림돌 판결 선정보고회'를 개최했다.

보고회에서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선고된 장애인 관련 판결들을 검토해 선정한 디딤돌 판결 6건, 걸림돌 판결 2건, 주목할 만한 판결 4건을 발표했다.

‘염전노예 장애인’ 눈물 닦아줘 항소심 판결

■디딤돌 판결=선정위원회에서 올해 ‘디딤돌 판결’로 가장 많이 언급됐던 사건은 ‘염전노예 사건 항소심 판결’이었다.

염전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지적장애인 근로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아 피해자들로부터 위자료 지급 청구 소송을 당한 국가와 지자체에 대법원이 배상책임을 최종적으로 인정한 것.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11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2019 장애인인권 디딤돌 걸림돌 판결'을 발표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지적장애인이었던 원고들은 염전에서 일하면서 폭행과 임금 횡령, 심하게는 살인미수 위협까지 당했다. 그러나 해당 사실을 알게 된 담당 경찰공무원은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방고용노동청 근로감독관에 인계한 뒤 내사를 종결했으며, 근로감독관 역시 아무런 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지난해 4월 1심에서는 피해자들이 무임금의 노동을 하고 있었으나 ‘가족의 각서’가 있었으므로 가해자를 기소하지 않은 경찰공무원과 근로감독관의 직무집행이 위법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같은 해 11월 항소심에서는 피해자들이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 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의 예견 가능성과 회피 가능성, 고의와 과실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 ‘유사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1심의 판결을 뒤집고 국가가 이들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국가와 지자체가 상고했지만 올해 대법원이 더 심리하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결정을 내림에 따라 피해자들이 3년 5개월 만에 최종 승소했다.

최정규 원곡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공무원의 부작위에 대한 국가배상 책임이 상당히 엄격한 조건 하에서 인정되는 대법원 판례에도 불구하고 1심 재판부와 달리 피해자들이 ‘절박하고 중대한 위험상태’에 놓여 있었음을 인정하고 공무원들의 회피 가능성 등을 판단의 전제로 삼으려는 적극적 태도를 보인 항소심 재판부의 태도는 피해자들의 피해구제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동력 착취사건이 대한민국에서 사라지는데 기여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휠체어사용인 임대주택 문턱제거 ‘계약해지 사유’ NO

임대주택에 거주하던 장애인이 발코니와 거실을 구분하는 문턱을 제거하고 옷가지를 걸을 수 있는 봉을 설치했다는 이유로 임대인인 한국토지주택공사로부터 ‘불법구조변경’이라며 임대차계약 해지와 주택 인도를 청구 받은 소송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도 디딤돌에 이름을 올렸다.

재판부는 피고는 중증장애가 있어 주택 내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상황인 점, 발코니와 거실에 있는 문턱이 걸림이 되어 피고가 휠체어로 집안 내에서 이동하기 쉽지 않았던 점, 제거된 문턱은 해당 주택의 구조적 안전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어렵지 않게 원상복구가 가능한 점 등에 비추어 임대차계약 해지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권재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정책홍보국장은 “장애인 등 주거약자의 안정적 거주권 확보에 기여했음은 물론, 장애계에서 지속적으로 요구해 온 주거환경 보장 및 개선, 주거비 및 개조 지원을 통한 주거 안정성 보장과 더불어 탈시설 요구 흐름에 따라 지역사회 내 삶의 그림을 그려 가는 데도 중요한 의미”라고 평가했다.

이밖에도 장애를 이유로 놀이시설 이용을 제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판단한 판결, 제대로 심사를 하지 않고 장애수당과 연금 지급을 정지하고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한 지방자치단체의 주장을 권리남용이라고 판단한 판결, 자폐성 장애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기소유예를 내린 검찰의 처분이 헌법상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 것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 지적장애인 성범죄 피해사건에서 가해자의 극구 부인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에 주목한 재판부의 판결 등이 올해의 디딤돌 판결로 선정됐다.

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대표가 11일 서울 여의도 이룸센터에서 '2019 장애인인권 디딤돌 걸림돌 판결'을 소개하고 있다. ⓒ에이블뉴스

시각장애인 볼라드 사고, 지자체 배상책임 60% 제한

■걸림돌 판결=대구 달성군에서 동생의 인도를 받으며 길을 걷던 시각장애인이 달성군에서 설치한 볼라드에 걸려 넘어졌다.

피해자는 요추 골절 등으로 전치 12주의 상해를 입었으며, 달성군은 요추 골절이 이 사건으로 인한 상해가 아니라며 피고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할 채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채무부존재 확인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인도하던 동생이 전방을 잘 살피지 않았고 피고를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다”며 지자체의 배상책임을 60%로 제한하며 사실상 지자체의 손을 들어줬다.

장애인권법센터 대표인 김예원 변호사는 “해당 재판부는 장애인을 종속적 존재로 본 것”이라면서 “인도자의 존재 여부에 따라 지자체의 책임성을 경감한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어 걸림돌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한편 장애인활동지원사가 자신이 지원하는 지적장애인 당사자와 함께 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중 피해자가 식사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젓가락과 주먹으로 폭행을 한 사건에 대한 판결도 걸림돌로 선정됐다.

이 사건의 재판부는 “피고인이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인다. 폭행의 정도가 무겁지 않고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으며, 피고인이 피해자의 활동지원사로 일하며 피해자의 가족과 신뢰관계를 형성했고 가족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형의 선고를 유예했다.

김 변호사는 “장애인활동지원사와 장애인 당사자 사이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사회는 이를 ‘가족 같은 관계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가볍게 인식하고 있다”며 “대다수의 장애인 학대 피해자들은 본인의 욕구나 의사를 밝히지 못한 채 학대 행위자의 지배적 환경에서 다양한 피해를 감내하며 지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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