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9월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에 장애인예산 보장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걸려 있는 모습. ⓒ에이블뉴스

역사는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권의 탄생 계기를 200여 년 전 프랑스혁명의 성공으로 기억한다.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념 아래 사회모순을 타파하고 보편적 인권 가치를 천명하기 위한 최초의 인권 혁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은 2001년 11월 26일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의 출범을 대한민국을 인권국가로 발돋움하게 한 인권 혁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개인의 기본적인 인권 보호와 인간의 존엄과 가치 구현'을 목적으로 한 종합적 인권전담기구이자 국가 독립기구인 인권위의 출범은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사회적 차별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아온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찾아온 한줄기 희망이었다. 그곳은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최 약자인 장애인들이 차별에 대한 구제의 손길을 바라며 즐겨 찾는 곳이다.

'차별을 없앨 수 있다면’…인권위 찾는 장애인 넘쳐

인권위가 2001년 문을 열자마자 처음 접수된 진정은 ‘장애차별’을 이유로 보건소장에 임명되지 못한 이희원(당시 39세) 씨가 낸 것이었다. 이후 약 9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인권위를 향한 장애인의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7월 2010지방선거장애인연대는 “6.2지방선거 당시 점자공보 면수 제한과 지하 투표소 설치 등의 이유로 장애인의 참정권을 침해받았다”며 집단 진정을 냈으며, 지난 6월 장애인단체들은 서울 시내 공공근린시설 중 장애인편의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곳의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을 냈다.

인권위 관련 자료에 따르면 장차법이 시행된 지난해, 인권위에 접수된 장애차별 진정은 총 745건으로 전체 차별 진정사건 1,720건의 43.2%에 달했다. 이는 인권위 출범 당시부터 장차법 시행 전인 2008년 4월 10일까지 접수된 장애차별 진정 630건을 크게 웃돈 수치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의 탄생은 장애인의 인권위 진정 건수를 가속화시킨 것이다.

장차법 제정에 앞장서온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옥순 사무국장은 “장애인과 같은 약자들은 소송이나 경찰 고발 등의 구제 방안에 접근하기 어려워, 구제받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인권위가 장차법을 토대로 한 차별시정기구가 되면서 장애인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됐다”고 전했다.

지난 4월 19일 장애인이 인권위 청사를 점거할 우려가 있다고 자체 판단한 인권위가 엘리베이터 전원을 내리고 진정을 내러온 장애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인권위 인권상담센터에 오르지 못하고 1층 엘리베이터 앞에 머물고 있는 장애인들. ⓒ에이블뉴스

장애인 차별하는 인권위?…조직 축소 위기도

인권위는 장애인에게 단순한 차별구제만을 위한 기구가 아니다. 인권위는 장애인이 정부 정책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근거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장애인들은 때론 인권위를 점거하고, 인권위 청사 앞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는다. 다른 기관과 다르게 장애인들이 인권위를 이용하는 이유는 인권위가 ‘인권 보호의 최후 보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위가 되레 장애인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장애인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4월 19일, 인권위는 진정을 내기 위해 인권위를 찾은 장애인들을 막았다. 장애인이 인권위 청사를 점거할 우려가 있다며 엘리베이터 전원을 내리고, 7층 인권상담센터 문을 닫아버린 것. 장애인들은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의 약점을 이용한 인권위가 어떻게 우리의 인권을 보호하느냐. 인권위가 우릴 차별하면 우린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며 망연자실했다.

인권위의 위기는 이미 예정됐다. 2007년 7월 장애인 차별 조사와 관련한 인원 증원의 필요성을 느낀 인권위가 정부에 장애인인권교육팀 등의 신설과 함께 기존 인원의 65명을 더 증원할 것을 요구했다. 장애인계도 정부에 장애차별 진정 담당인력 증원을 요구했고, 행정안전부(당시 행정자치부)가 인력 20명 증원 등을 일부 승인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 정부는 지난해 초 인권위 조직의 21.2%를 축소하며, 인권위 전체 인원을 208명에서 164명으로 강행 축소시켰다. 인원 축소는 인권위의 독립성 훼손은 물론, 인권위가 ‘권리 구제’라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지난 해 초 인권위 독립성 보장 및 조직 축소 철회 공동투쟁단은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행안부의 편파적이고 정치적인 인권위 축소방침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에이블뉴스

인권위의 권한 축소는 권고 수용률에서도 그 심각성을 볼 수 있다. 인권위에 따르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인권위의 권고 수용률은 65.6%에 그치고 있다. 이는 인권위가 개선을 권고한 536건 가운데 정부는 352건만을 수용한 것으로 참여정부 5년간의 인권위 권고수용률 79.3%보다 13.7% 낮은 수치다. 이 같은 인권위의 권한 축소는 장애인을 여전히 차별이란 굴레에 가두고 있다.

지난해 인권위는 2008년 7월 30일 실시된 서울시교육감선거 당시 장애인 편의시설이나 투표보조용구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장차법에 위반한 차별행위라며 중앙선거관리위원장 등에 시정권고 조치를 내린 바 있다. 하지만 시정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장애인들은 이번 6.2지방선거에서 또다시 심각한 권리 침해를 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장애인들은 권리 구제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고 있다. 지난 7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장애인의 보험 차별을 이유로 보험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함과 동시에 장애인의 보험 차별을 조장하는 상법 제732조 개정을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소송을 진행했다. 상법 제732조 개정에 대한 인권위의 삭제개정 권고에도 수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소송 진행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가진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공익소송지원단 설창일 변호사는 "인권위에서도 상법 732조 삭제를 법무부에 권고했고, 국회에 폐지안도 제출됐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바뀌지 않았다. 기다리기보단 소송을 통해 바꿔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인권보호와 차별구제, 독립적 기구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 위기를 잠식시키기 위해 인권위는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장애인계는 인권위 내 인력 충원이 우선시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옥순 사무국장은 “장애인 차별은 사람의 마음을 할퀴고 상처를 내는데, 그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선 많은 시간과 함께 차별 조사가 필요하다”며 “장애차별 조사관의 수를 반드시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옥순 사무국장은 “장애 차별이 미리 예방될 수 있도록 인권위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줘야 한다”며 “장애차별조사과 내에 인권교육팀을 따로 신설해 장애인 인권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인권위가 스스로 문제를 풀지 못하자 또 다시 장애인들이 문제 해결에 나섰다. 지난 8월 3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대표단은 행정안전부 관계자들과 면담을 가졌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장애차별조사와 정책, 인권교육에 필요한 인력을 충원하라고 요구하기 위한 자리였다. 박 사무국장은 “인권위가 장애인 차별을 예방하는 장차법 시정기구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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