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울고, 분노하고,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요. TV를 보는 모습은 다양해도 우리는 모두 시청자입니다. 일부의 특수함이 아닌 다양함으로, 동등한 시청자의 세상, 장애인방송이 만들어 갑니다.“

시청자미디어재단에서 제작한 장애인방송서비스 관련 홍보 동영상에 나오는 문구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어와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이 담긴 이 광고는 거의 모든 방송사들이 시청자들에게 홍보하는데 과연 그 실천 정도는 어떨까? 의문부호 속 시각장애인의 TV 시청권의 현주소는 어디인지 살펴보려 한다.

1990년대 초반 출범한 케이블TV, 2000년대 시작과 함께 출범한 스카이라이프의 등장으로 대한민국 TV 방송사는 거대한 채널을 형성하게 된다. 뉴스, 스포츠, 예능 연예전문 채널과 드라마, 건강채널, 여기에 종교채널, 장애인전문 채널인 복지TV까지, 말 그대로 전문성을 갖춘 채널들로 무장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경쟁에 나섰다.

눈으로 화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던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을 하려는 화면해설방송 출범도 다양한 채널과 함께 등장하며, 라디오에서 사라져버린 드라마, 스포츠 등의 시‧청취권 확보를 위한 행보를 본격화했다.

그러나 잇따라 개국한 방송사들은 TV는 오로지 눈으로 즐긴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시각장애인은 시청자에서 배제하려는 행보를 동시에 보였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에 맞춰 세계화를 표방한다는 미명아래 TV 속 독한 바이러스이자 시각장애인들에게는 괴물로 불리는 단어를 등장시키기에 이른다.

하나의 방영프로그램을 마치고 다음 프로그램을 고지하는 음성으로 전 국민에게 영어 학습을 시키겠다는 일념인지, 우리말로 다음을 뜻하는 영어 Next를 등장시킨 것이다. 당차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Next를 말하고 곧이어 TV 화면 속엔 영상과 자막으로 다음에 방영할 프로그램을 보여준 뒤, 역시 같은 방식의 음성으로 자사 로고를 내보내며 마무리하는 방식을 마치 방송가의 세계화인 양 앞 다투어 도입했다.

시각장애인은 이 순간, 방영하는 프로그램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을 실감해 왔다. 잇따라 도입하는 TV 속 괴물 Next를 제거하기 위해 방송에 관심을 가진 시각장애인들이 나서 봤으나 거대한 방송 권력은 이런저런 이유들을 나열하며 이를 철저히 외면해 왔다.

화면해설방송 송출 비율을 채워 가면서도 정작 그 기초가 되는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은 철저히 외면하는 전략을 구사해 온 것이다. 2012년 출범한 종편 채널들까지 이 대열에 합류하면서 TV 속 괴물인 Next는 절정에 도달했다.

스마트 시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표방하는 목소리가 높아가던 때에 대한민국 시각장애인을 대변해 온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시각장애인의 방송 시‧청취 접근 불편을 개선하려는 행보에 나섰다. 방송사들과 잇따라 접촉하며 15년간 TV 속에 살아있던 괴물 Next를 제거하기 위한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한 것이다.

공문을 발송하고, 면담을 요청해도 마치 굳건한 공동 대응 전선을 구축한 듯, 방송사들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이에 방송사 하나하나와 개별적인 접촉을 시도했고, 마침내 희미한 불빛이 비치기 시작했다.

Next나 자사 로고도 없이 영상과 자막으로 방영프로그램을 고지하던 CBS 기독교TV가 시각장애인의 방송 시‧청취 불편 개선 요청을 단 2주만에 단행한 것이다. 이는 시각장애인들의 TV 시‧청취권 불편 개선 기대를 부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곧바로 방송사들이 시각장애인 시청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현실을 질타하는 홍보전에 나섰고, 보도를 접한 방송사들은 이에 화답하기에 이른다.

개국 후 단 한 번도 음성 안내 없이 방영프로그램을 고지해 온 24시간 뉴스전문채널인 연합뉴스TV와 YTN이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을 하겠다는 응답을 거의 동일한 시기에 보내왔다. 뒤이어 채널A, JTBC 등 다른 종편채널들도 이 대열에 합류하기에 이른다.

이를 신호탄으로 삼아 냉담하게 대응해온 방송사들과 TV 속 괴물로 불리는 Next 제거를 위한 전쟁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첫 번째 주자는 KBS N 스포츠. 당시 본부장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면담 요청을 받아들였고, 면담에서는 시각장애인의 TV 시‧청취 불편 사례를 직접 보여주며, 이와 같은 불편사항을 걷어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본부장은 곧바로 담당 국장에게 빠르게 검토하여 시각장애인이 우리 방송을 시‧청취하는 불편 요소들을 제거하며, 대화를 통해 보완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국장은 방송 제작 현장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토로하며 수용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연합회 실무진과의 대화를 지켜보던 본부장은 제작 현장의 어려운 환경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장애 요소를 걷어내고자 하는 맘으로 우선 시각장애인 시·청취자들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한 발짝씩 내딛겠다는 각오로 방송 편성 제작에 임할 것을 주문했다.

담당 국장은 올해 안에 절반 정도로 목표를 잡아 방영프로그램 음성 고지에 나서겠다고 말하며 양측의 첫 만남은 나름 성과를 거두었다. 본부장과의 면담 후 담당 국장은 KBS N스포츠 일선에서 뛰는 현장 방송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애인 인식교육을 제안해 왔다.

“시각장애인의 TV 시‧청취 불편 개선 필요”를 주제로 한 현장교육의 백미는 블라인드 체험이었다. TV 화면을 끈 채 오디오로만 Next를 외친 후 방영프로그램을 알아맞히는 시간을 통해 현장교육은 웃음 속에서 이해 간격의 폭을 좁혔고, 다양한 반응을 끌어냈다.

“시각장애인이 TV 시‧청취에 이렇듯 관심이 잊는 줄 몰랐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제작에 힘을 보태겠다”는 현장 실무진의 반응을 확인했다. 이후 이들의 실천은 놀라운 반응으로 표출됐다. 당초 연말까지 50% 목표 달성을 얘기하던 KBS N스포츠가 협상 3개월 만에 100% 방영 프로그램 음성 삽입을 단행했고, 이 선한 영향력은 KBS N계열사들의 드라마, 예능, 여성전문채널 등으로 확산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방송가의 변화는 이후 급물살을 탄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의 강단 있고 절실한 대응을 시청자미디어재단이 지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Next 제거에 소극적인 대표적 인기 채널들, MBC스포츠와 SBS스포츠 실무 담당자들과의 협상의 연결고리가 되어 주었다.

인기채널을 운영하는 두 방송사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부각하며 현 상황에서는 시각장애인 시청자를 배려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며 맞섰다. 두 시간 넘는 2:1 설전은 먼저 SBS 스포츠채널 편성부장이 방향을 급선회하며 극적 타결의 신호탄이 되었다. 2018년 4월 말, 이 역사적 타결은 SBS스포츠채널에서 준비를 갖춰 2개월 후부터 100% 음성삽입을 약속했고, 곧바로 MBC스포츠도 이 대열에 함께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선한 영향력은 또 다른 계열사로 퍼져, SBS미디어그룹, MBC의 또 다른 계열사인 드라마 및 예능 채널들에 이르기까지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에 나선 상황이다. 시각장애인 시‧청취자를 바라보는 방송가의 시선 변화는 또 다른 방송사 tvN과 교통방송 TBS TV, 종교방송 채널 등으로까지 이어져, TV 속 괴물 Next 제거 전쟁 4년 여를 거친 현재는 방송사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 사실상 종전 선언에 근접해 있다.

그 다음 시각장애인의 방송 시‧청취 장애 제거 목적지는 입을 열지 않는 채널들이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대표적인 두 방송사를 타겟으로 하여 접촉에 접촉을 거듭하고 있는데 그 연수가 상당하다. 하나의 이름으로 프리미엄 2개 채널을 포함해 스포츠채널을 5개나 보유해 운영하는 스포TV는 아무런 말없이 자막과 영상으로 방영프로그램을 고지, 다양하게 늘려가는 스포츠 종목 중계 편성 런칭 제작과는 상반된 행보를 보였다.

접촉 과정에서는 곧 시각장애인 편에 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편성 제작을 시행할 수 있을 듯한 답을 주면서도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됐다. 그러나 2년에 가까운 양측 실무진의 인내와 끈질긴 대화를 이어오던 중 지난해 6월부터 프리미엄채널을 포함한 모든 채널의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에 나서며, 보다 세밀한 중계방송 기법으로 시각장애인 TV 시‧청취 불편 개선 대열에 합류했다.

여기에 정부정책 홍보방송 KTV도 올 1월을 기해 닫혀 있던 말문을 열어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을 통해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제작 행보에 나서고 있으며, 국회방송 역시 오는 6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방송 제작 편성을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하지만 국민의 방송으로 불리는 KBS 1TV는 여전히 억지스런 편성을 진행 중이다. 2019년 여름부터 시작한 시각장애인의 편의를 도모하는 방송 제작 요청에 지극히 소극적으로 대응해오고 있다. 광고 없는 방송, 재난방송사임을 내세우며 방영프로그램 음성삽입을 완강히 거부하던 중, 2020년 1월 2일을 기해 하루 4~5 편씩, 그것도 주말과 휴일은 쉰 채 방영프로그램 음성 삽입을 시행하고 있다. 물론 창사 이래 최초의 일이나 이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형국이다. 장애인을 위한 “사랑의 소리방송”인 제3라디오를 보유하고 있는 KBS를 향해 자연스럽게 시각장애인은 국민이 아닌지를 묻게 된다.

이제 방송가는 어떻게 하면 시각장애인이 TV를 통해 뉴스 시사, 스포츠와 드라마, 예능에 이르기까지 편안하게 즐길 수 있게 할지 고민하고 있다. 특히 시각장애인의 시‧청취 불편 개선 요청을 단 2주 만에 단행한 CBS 기독교TV에서 보여준 신속성과, 협상 과정에서 방송 제작 현장의 어려움을 강조하며 시각장애인을 시청자로 바라봐 주길 요청하는 제안을 받고서도 완강하게 버텨 온 MBC 및 SBS스포츠를 비롯한 계열사들, 여기에 시각장애인의 TV 시‧청취 불편 개선을 위한 방송가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사례의 주역 KBS N스포츠를 포함한 계열사도 시각장애인 시청자들을 품기 위한 초심과 배려의 마음을 더하려 힘쓰고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와 끊임없이 소통하며 시각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 제작에 힘쓰고 있는 고마운 방송사가 돼 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다양해진 방송사들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며 시‧청취 불편 개선을 통한 접근성 강화에 매진할 예정이다. 여기엔 보다 세밀한 화면해설방송 제작 편성도 포함될 것이다.

법제화된 의무 편성 비율 채우기가 아니라, 시각장애인들이 실질적인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전문성 담긴 화면해설방송이 제작 및 방영될 수 있도록 모니터링 강화에 주력, 방송가의 새로운 변화를 이끄는 일에 지금보다 더욱 매진할 것이다.

한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는 장애인을 동등한 시청자로 여기며 방송 편성에 주력하는 SBS스포츠, 스포TV 그리고 24시간 뉴스전문채널 YTN과 연합뉴스TV 등의 방송사들을 선정, 감사패를 전하며 고마운 마음을 표하게 된다.

“중도시각장애인이 된 내 지인이 내가 하는 중계방송을 듣는다 생각하며 말 한마디라도 더 해, 방송을 듣는 동안 보지 못해 스트레스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어느 아나운서가 방송 중계에 임하며 가졌다는 마음가짐으로 얼마나 많은 방송사들이 이행하느냐가 TV 시청에서 오는 동등함을 볼 수 있을지를 판가름하게 될 것이다.

라디오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드라마, 스포츠 중계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 시청 시, 안방에서 TV를 즐기는 시각장애인 시청자의 존재를 부디 잊지 않기를 지금도 안방에서 TV를 켠 대한민국의 모든 시각장애인은 소망한다.

*이 글은 양남규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이사님이 보내왔습니다. 에이블뉴스 회원 가입을 하고, 취재팀(02-792-7166)으로 전화연락을 주시면 직접 글을 등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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