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 네이버포토앨범.

우리 아들한테는 특별한 노래가 있다. 어쩌면 우리 부부 두 사람의 노래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시어머님만 빼고, 세상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나는 곧 아이를 가졌다. 우리는 뱃속의 아이와 날마다 대화하고 쓰다듬어주면서 아이의 이름을 먼저 지어놓았는데,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단(旦)-, 여자아이가 나오면 연음하여 -다니-라고 하기로 했다.

'시작', '원단' 이라는 한자인 旦은 '아침'이라는 상쾌하고 밝은 뜻도 포함하고 있어서 좋았고 또 국제화 시대에 부응하여 누구나 쉽게 발음할 수 있는 부드러운 이름이라서 우리는 아주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 이름을 가지고 노래를 만들었다. 콩나물 대가리가 있는 정식 노래가 아니라 혼자 흥얼거리다가 굳어버린 노래였다. 그 노래를 동네방네 다 자랑하고 싶지만, 지금 여기서 불러드릴 수는 없고 가사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단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주신 약속∼

우리 단이는 엄마아빠가 기다려온 축복입니다∼

다니다니 예쁜 다아니∼ 다니다니 착한 다아니∼

다니다니 씩씩한 다니∼ 다니다니 훌륭한 다니.

그리고 다시 앞의 두 구절을 반복하고는, 뒷부분의 후렴은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붙였다.

이를테면, '다니다니 용감한 단이'. '다니다니 똑똑한 단이'. '다니다니 멋있는 단이'.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 불러도 부를 수 있는 노래였다.

그리고 또 있다.

음치에 가까운 나는 아들을 잉태하자마자 시인이 되고 음악가가 되었다. 입만 열면 노래가 줄줄줄 흘러나왔다.

만나보자, 만나보자. 단이하고 엄마하고.

만나보자, 만나보자. 단이하고 아빠하∼고.

손뼉치고 안아주고,

안아주고 뽀뽀하∼고.

만나보자, 만나보자 엄마하고 아들하고

만나보자, 만나보자 아빠하고 아들하고

안아주고 볼 비비고.

볼 비비고 안아주∼고.

이 노래도 이렇게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좋은 가사를 갖다 붙이기만 하면 되는 편리하고도 신나는 노래였다. 우리 부부는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이 노래를 들려주면서, 아이의 뻥뻥 차는 축구공놀이를 같이 즐기곤 했었다.

얼마 전의 일이었다.

토요일 오후였는데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고 1인 아들녀석이 다쳐서 병원에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들끼리 놀다가 좀 다친 것이라고 해서 안심은 되었지만 그래도 먹먹한데 아들녀석이 금방 전화를 해서는 "엄마, 나 별로 안 다쳤어. 괜찮아. 천천히 와요" 그러길래 의료보험카드가 필요한 것이려니 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하니깐 친구녀석들이 병원 앞에서 웅성거리고 있고, 아이는 온 옷에 피범벅인데, 의사는 상처를 보여주고 수술실에 들어가려고 기다렸다면서 머리에 감은 아이의 붕대를 벗겼다.

그런데 정말이지 한 쪽 이마의 뼈가 훌러덩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의사의 팔을 붙잡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아이는, "난 하나도 안 아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다.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은 것 같지만, 환부가 커서 수술실에 들어가서 꿰매겠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아이가 침착한 걸 보고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만, 다른 데도 아닌 머리를 부딪친 것이라서 큰 병원으로 옮겨야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몇 군데 전화를 해보았다.

-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자전거를 타고 길모퉁이를 도는 중에 뒤에서 따라오는 버스를 피하려고 급브레이크를 밟다가 붕 날아서 아파트 벽에 가 부딪친 모양이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라 종합병원에도 인턴이나 레지던트 밖에 없을 거라고 그러고, 그나마 이 병원은 노련한 전문의니깐 상처 외에는 별 문제가 없다는 말을 믿고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진료실 밖을 나오자 친구녀석들이 무게를 잔뜩 잡고는 가까이 오더니 대뜸 이러는 것이 아닌가.

"병원을 빨리 옮겨야 되요."

"이 병원 엉터리예요. 전에 우리 아는 사람도 괜찮다고 붙들어두었다가 식물인간 되었잖아요."

"정형외과가 뭘 알아요? 뼈붙이는 것밖에 모르죠."

나는 이 말을 들으니깐 또 어쩔 줄을 모르겠다.

어디 아는 의사라도 있어야 토요일에도 전문의를 만나볼 수 있도록 부탁이라도 해보지, 그렇지 않고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런 내 심정을 헤아렸는지 사무장되는 남자분이 와서는 그랬다.

"우리가 뒤에 무슨 탓을 들으려고 괜히 환자를 붙들겠어요. 우리는 경험으로 압니다. 내상이 아니라는 것을요."

나는 다시 그 말을 믿기로 하고 아이 친구들한테로 갔다.

"너희들 있잖아, 우리 단이는 기도하고 낳은 아이니깐…."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솟구쳤다. 아이들도 어쩔 줄을 모르고 고개를 푹 숙이더니 들 줄을 모른다.

'기도하고 낳은 아이니까 더 이상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을거야. 그러니까 이제 나쁜 상황으로의 생각은 그만두고 수술이 잘 되기만으로 마음을 모아 줘.'

나는 이렇게 말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어쨌는지도 모르는 채로 아이는 수술실로 들어가고 나는 그 앞까지 따라 갔다. 작은 병원이라 수술실은 좁은 지하에 있어서 올라가서 기다리라고 의사가 그랬지만 그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는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불렀다.

우리 단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주신 약속.

우리 단이는 엄마 아빠가 기다려온 축복입니다.

다니 다니 예쁜 다니, 다니 다니 착한 다아니

다니 다니 씩씩한 다니, 다니 다니 용감한 다니∼

이 노래는 아들을 지켜줄 뿐만 아니라 불안함으로 떨리고 있는 내 마음까지 평온하게 지켜주고 보호해 주었다.

수술은 간단하게 잘 진행되었고 열흘이 지나고 나서 실밥을 모두 풀었다. 지금은 빨간 흉터가 옆머리와 이마를 가로질러 남아 있지만, 그 정도에 그친 것을 두고두고 감사할 뿐이다.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일찌감치 바느질을 배워 혼자서 살 궁리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을 거역하고 울며 불면서 억지로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가장 되고 싶었던 것은 국어 선생님이었고 다음에 되고 싶은 것은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교사임용 순위고사에서는 신체상의 결격으로 불합격되어 그나마 일년 남짓 거제도의 한 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를 한 적이 있고, 다음에 정립회관에서 상담교사로 근무를 하다가 2급 지체장애인인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87년에는 친구처럼 듬직한 아들을 낳았고 94년에 동서문학 소설부문 신인상으로 등단을 했다. 김미선씨의 글은 한국DPI 홈페이지(www.dpikorea.org)에서도 연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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