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에 맺은 좋은 인연은 오랫동안 추억이 되어 가슴에 남는다

한번에 휴가를 가지 못하고 나눠서 낸 두 번째 여름휴가 여행은 또 하나의 좋은 인연을 맺게 하였다. 울진에서 피서객이라고는 하나 없는 조용한 동해바다의 푸르름에 맘껏 취해보고, 불영계곡의 불영사를 둘러보고 나니, 안동의 근이양증 장애인인 권오윤 선생 부부의 안부가 궁금하고 금춘가족들이 보고싶어 그들을 찾기로 하였다.

예안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저녁 일곱시, 권 선생 집의 문을 두드리니, 권선생 부부와 대구에서 온 손님 두 사람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처음 만난 권선생의 두 손님은 권 선생과 같은 근이양증 장애를 가진 아들을 두었던 강정옥 여사와 그녀의 좋은 이웃으로 차량봉사를 해주는 안병준 선생이었다. 그들도 금춘가족의 회원이니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처음 만남이 전혀 낯설지는 않았다.

마침 권 선생의 생일날이라서 축하해주려고 아침에 왔다가 대구로 돌아가려던 길이었다고 한다. 첫인사를 나누고 강여사는 대구로 돌아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하였다. 저녁식사를 하고 권 선생이 다녔다는 조그만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가서 모깃불을 피워놓고 노래도 부르고, 강여사의 가슴에 묻은 열 일곱살 아들이야기도 들었다.

올해 나이 두시람 다 오십인 권 선생과 강여사가 인연을 맺은 지는 20년이 넘었다고 한다. 장애아들을 둔 억척엄마로 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해 대구장애인부모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버스도 들어가지 않는 경북의 오지마을에 사는 근이양증 장애인까지 찾아다니며 그들의 권익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 활발한 활동을 하여 장한 어머니상까지 받았다고 한다.

강여사는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뜬 뒤로 아들 생각이 나서 가슴이 답답해질 때면 자신과 동갑나기 권선생을 찾아와 동무겸 아들겸 해서 이야기도 나누고, 척추장애를 가진 권선생 부인을 위해 집안살림을 도와주고 간다고 한다.

아마도 강여사는 스스로가 말하듯이 권 선생을 아들처럼 여기면서 보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이는 같지만 권 선생의 장애가 심해질수록 먼저간 아들처럼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듯 하였다.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애절한 그 마음이 그대로 묻어났다.

수 년전 권선생이 아들에게 보낸 격려의 편지를 수첩에서 꺼내 보여주면서 어쩌면 자신은 권 선생과 같은 동병상련의 의지처가 없었다면 아들을 먼저 보내놓고 아마도 긴 방황을 했을 것이라 회상하였다.

"어느새 바람 불어와 옷깃을…." 강여사는 아들이 좋아하던 노래라며 해후를 잔잔한 음성으로 부르고 난 뒤, 아들에 대한 그리움을 들려주었다, 근이양증 관련 소식지를 받은 아들은 한 달에 한 두건 근이양증 장애인의 사망소식을 읽으며 진행성인 자신의 장애를 몹시도 슬퍼했다고 한다.

아들이 어느 날인가 진행성 장애가 아닌 뇌성마비인들이 부럽다고 말한 적도 있었다면서 나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역시 언어장애가 없는 타 장애인을 부러워 한 적이 있었기에 충분히 그 심정을 이해하고 남음이 있었다.

권 선생은 베틀에 앉아 안동포를 짜던 어머니가 부르던 베틀가를 구성지게 불러 주었다.(다음 글에 베틀가 가사에 대한 글을 올리려고 한다) 시조창을 하듯이 구성지게 뽑던 베틀가의 구구 절절한 가사와 가락은 형언할 수 없는 향수에 젖게 하였다. TV에서 본 시골아낙이 부르는 민요소리, 그런 소리였다. 깊어 가는 어둠 속에 별들이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마음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끝없이 풀어냈다.

짧은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어디서도 누구에게도 쉽게 터놓을 수 없는 속내를 털어놓으니 서로의 가슴에 이야기 만리장성이라도 쌓은 기분이었다. 장애인으로 살고, 장애가족 때문에 가슴아픈 사연을 갖고 살지만, 그들에게 장애는 그리 문제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서로 서로 도움을 주면서 제 멋에 겨워 사는 아주 행복한 사람들이었다.

다음날 오후, 강여사가 비벼준 비빔국수로 점심을 먹고 난 후, 가을에 다시 한번 만날 기약을 남기고 일어섰다. 외출이 쉽지 않은 권 선생 부부는 강여사를 따라 청량산 계곡으로 오후나들이를 나서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최명숙씨는 한국방송통신대를 졸업하고 1991년부터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홍보담당으로 근무하고 있다. 또한 시인으로 한국장애인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1995년에 곰두리문학상 소설 부문 입상, 2000년 솟대문학 본상을 수상했으며 2002년 장애인의 날에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시집 '버리지 않아도 소유한 것은 절로 떠난다' 등 4권이 있다. 일상 가운데 만나는 뇌성마비친구들, 언론사 기자들, 우연히 스치는 사람 등 무수한 사람들, 이들과 엮어 가는 삶은 지나가면 기쁜 것이든 슬픈 것이든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남으니 만나는 사람마다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고, 스스로도 아름답게 기억되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속에 기쁜 희망의 햇살을 담고 사는 게 그녀의 꿈이다. ■한국뇌성마비복지회 홈페이지 http://www.kscp.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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