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은 위로 내리 딸만 다섯에다 막내로 아들이 하나뿐인 딸부자집이었다. 나는 네 번째 딸로 태어났지만 초등학교에도 들어가기 전 어느날 큰언니가 앓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셋째딸이 되었다.

우리집은 대가족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삼촌들, 그리고 시골에서 올라온 친척들까지 보통 열 식구가 훌쩍 넘곤 했다. 내 아버지가 서울땅에서 자수성가했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어떻게든 살길을 찾아보겠다고 우리집을 찾는 통에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맏며느리 노릇도 모자라 사돈의 팔촌들 시중까지 들어야 했다.

엄마는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분이었기에 맏며느리로서 당연히 친척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집안이 늘 들락거리는 친척들로 북적거릴 수가 없었을 터였다.

그런 까닭에 소문과는 달리 우리집은 그리 넉넉지가 못했다. 아버지 혼자 벌어서는 열 식구가 넘는 대가족을 먹여살리기가 빠듯했던 것이다. 그 빠듯한 살림살이를 엄마는 알뜰하게 해나갔다. 자식들에게는 변변한 새옷 한 벌 못해 입혀도 친척들의 마음이 행여나 상할까 후하게 대했다. 친척들의 요구가 지나칠 때면 가끔 아버지 또는 할머니와 마찰이 생기기도 했었지만 대체로 엄마는 맏며느리 노릇을 기꺼이 감당했던 듯하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두 살 터울이었다. 그래서 우리 어릴 적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옷이며 학용품 따위를 모두 동생이 물려받았다. 헌데 작은 언니는 큰언니보다 덩치가 컸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큰언니 옷은 나와 여동생이 물려입어야 했다. 심지어 내복까지도 언니가 입다가 작으면 여기저기 기워서 물려입었다. 그땐 다른집도 모두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감히 싫다거나 새옷을 사달라는 말은 꺼내보지도 못했다. 남동생은 물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기에 늘 새옷만 입었다.

어느날 엄마가 평화시장에 다녀왔다. 지독하게 허리띠를 졸라매야만 하는 일상이 견디기 힘들어지면 엄마는 일년에 한두번 쇼핑을 다녀오곤 했다. 하루 온종일 시장 구석구석을 돌다가 가장 싸고 좋은 옷을 골라 사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장보따리 속에는 엄마 자신을 위한 물건은 하나도 없고 언제나 아이들과 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것들만 들어있었다. '다리 아파 죽겠다' '점심도 굶고 하루종일 돌아다녔다'면서도 좋은 옷을 싸게 샀다는 생각에서 마냥 뿌듯한 심정으로 엄마는 아이들에게 옷을 입혀보았다.

하지만 여러 벌의 옷 중에서 내것은 늘 마땅치가 않았다. 나는 나이에 비해 체구도 작고 머리도 늘 짧은 커트였기 때문에 내 또래 여자아이들에게 어울릴 법한 옷이 전혀 맞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새옷들은 늘 언니들이나 여동생에게 돌아갔다.

"참 이상하네. 너한테 맞을 줄 알았는데... 이건 언니 입으라고 하고, 네 건 다음에 사다줄게. 우리 셋째 착하지?"

엄마의 말은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우리집 형편으론 언제 다시 새옷을 얻어입을 날이 올지 막연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 엄마는 언니들 옷 중에서 그중 새것을 꺼내다 주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미 다쳐있는 내 마음은 이제 무엇으로도 보상이 되질 않았다. 엄마가 분주한 틈을 타 나는 언니들과 동생들이 새옷을 입고 좋아하고 있는 현장을 슬그머니 벗어났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도 모르게 설움이 복받쳐 '엉엉' 소리내서 울고 말았다. 울음소리를 듣고 엄마가 쫓아왔다.

"네 걸 안 사온 게 아니라 사왔는데 맞지를 않으니 어쩌니. 다음에 꼭 맞는 걸로 사다줄게. 울지 마라."

아무리 달래도 내 울음이 그치지를 않으니 엄마는 '무슨 애가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느냐'며 야단을 쳤다. 억지로라도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결국 혼자서 꺼이꺼이거리다 집안 한구석에서 잠이 들곤 했다. 한참을 자고 나니 이웃집 아줌마가 와 있었다. 마침 엄마는 내 이야기 중이었다.

"무슨 애가 샘이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어요. 내가 제것을 일부러 안 사온 것도 아니고, 잘 안 맞아서 그런 건데... "

내가 샘이 많다고? 하지만 내 입장에서 샘이 많다는 평가는 좀 억울했다. 나도 처음엔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엄마의 시장보따리에는 항상 내게 맞는 새옷이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의 옷을 고를 때 엄마의 뇌리에는 처음부터 내가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나는 늘 예쁘게 꾸며주고 싶은 다른 딸들과는 다른 존재였던 것이다.

"막말로 저애에게 예쁜 옷을 입히면 뭐하겠어요? 몸도 성치 않은 애가 샘까지 많아서 큰일이네요."

엄마의 넋두리를 훔쳐 듣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예쁠 필요가 없는 딸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장바구니에는 내게 맞는 새옷이 처음부터 늘 없었던 것이다. 나는 분수도 모르고 예쁜 옷을 탐한 어리석은 아이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 여성성을 부정당했다. 그리고 그후로 오랫동안 '샘 많은 아이'라는 걱정 아닌 걱정을 들어야 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샘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흉이 되거나 걱정을 들어야 할 일로는 여겨지기 않았기에 두고두고 억울했다. 그때 내가 눈물을 보이지 않거나 적어도 식구들이 듣지 않도록 소리내어 울지 않았어야 했다고 두고두고 후회했다.

엄마는 아마도 내가 여성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내가 겪어야 할 아픔을 예견해 걱정이 앞선 나머지 짐짓 그것을 부정하는 쪽을 택한 듯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장 사랑하는 엄마―엄마도 여자이다―에게 여성성을 부정당한 나는 그 뒤부터 마음 한 구석을 닫아버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나는 엄마를 안심시키거나 비난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의 여성성을 최대한 부정하거나 최소한 숨기는 쪽을 택하게 되었다. 예쁜 옷 따윈 관심도 없는 것처럼. 그래야만 분수도 모르고 예쁜 것을 탐하는 어리석은 아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때 이후로 나는 서서히 감정을 억압하는 법을 배워나갔던 듯하다. 정말로 하고 싶은 내 말, 내 목소리는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고 남의 언어, 남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법을 익혔다고나 할까?

장애가 있는 사람도 샘이 많을 수 있고(샘이 많으면 성취욕도 강하다), 성깔이 있을 수 있으며, 활달할 수도 있고 온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의 개성은 무시한 채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떤 특성을 꼭 장애와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개성을 개성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사람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근거로 삼곤 한다. 장애가 있는데다 샘까지 많다든가 장애가 있으니까 성깔이 있다는 식으로...

언제쯤 우리네 장애인들은 장애라는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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