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필(筆)을 드니 마치 상봉한 듯 반갑구나. 어미는 잘 지내고 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크느냐? ...'

할머니는 부산으로 시집간 막내딸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늘 내게 대필을 시켰다. 어린 나는 '상봉' 어쩌고 하는 말이 우습기도 하고 영 어색하기만 했다.

"할머니 꼭 그렇게 써야 해요? 그냥 말하는 것처럼 하지..."

"그냥 시키는 대로 하지 뭔 잔소리가 그리 많누?"

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할머니를 거역하지 못하고 할머니가 부르는 대로 편지를 써내려갔다. 구술이 끝나면 할머니는 내게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가 된 것처럼 낯간지러운 문어체의 편지를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언제나 애절하게 보고 싶다는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어 할머니와 함께 눈시울을 붉히곤 했다.

"자알 썼다!"

할머니가 만족스러워 하시면 나도 기뻤다. 나는 가끔 그렇게 할머니의 편지를 대필했다. 편지의 내용은 대개 비슷비슷했기에 나중에는 '할머니, 다음에는 이렇게 쓸까요?'라며 앞질러갈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편지지를 앞에 두고 막내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미처 수습하지 못해 막막해하던 할머니의 표정이 금새 환해지곤 했다.

엄마 역시 내게 대필을 시켰다. 그땐 전화가 발달하지 못했기에 울산에 정착하게 된 작은엄마가 웃동서인 엄마에게 편지를 가끔 보내면 내가 답장을 썼다. 엄마는 할머니와 달리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쓰라고 전체 줄거리만 잡아주었다. 그러면 나는 마치 엄마가 된 것처럼 동서에게, 어쩌고 하며 편지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작성한 편지를 쭈욱 읽어드리고 나면 별다른 가필 없이 통과되곤 했다.

"넌 어쩜 그렇게도 외할머니를 닮았니?"

엄마는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내 모습이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꼭 닮았다고 했다. 외할머니는 양반댁 딸로 태어나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글공부를 했던 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출가해서 아이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쫓겨난 뒤 친정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기구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엄마 어릴적 동네에서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외할머니는 동네사람들에게 인기가 대단했었다. 저녁이면 귀한 먹거리를 싸들고 할머니를 찾아오는 동네사람들 덕에 외할아버지가 샘을 낼 정도였다. 외할머니가 '춘향전'이나 '장화홍련전' 등 소설책을 읽어내려가면 동네 아낙들이 눈물을 주르르 흘리곤 했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은 외지로 나간 식구들이 보내온 편지를 대독하거나 답장을 하고 싶을 땐 언제나 외할머니를 찾았다고 한다.

엄마의 남동생인 외삼촌 역시 내가 겉모습은 물론 하는 짓까지 그런 외할머니를 빼닮았다며 나를 귀여워해주셨다. 내게는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었는데, 엄마와 외삼촌이 그렇게 말씀들 하시니까 그저 그런 줄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튼 나는 외할머니를 빼닮은 덕분에 가족 내에서 일찌감치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아무런 역할도 기대치도 없이 의존적으로 길들여지기만 할 뻔했는데 그래도 꽤 대접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그 역할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펜팔이 유행이었다.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써낸 위문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오는 군인아저씨나 (내가 다녔던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은) 벽지 어린이들이 있어 펜팔이 성립될 수 있었다. 나는 군인아저씨와 벽지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한번 위문편지를 보내면 보통 너댓통의 답장이 왔다. 그리고 또다시 답장을 해주면 상대방의 옆사람들도 덩달아 내게 편지를 보내 금새 펜팔친구(?)가 늘어나곤 했다.

나는 그 중에서 제일 맘에 드는 한두 사람과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예쁜 편지지를 모았다가 하나씩 꺼내 상대방을 상상하며 정성껏 편지를 쓰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이제나 저제나 답장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가끔 주고받는 선물도 신선했다. 나는 이제 외로운 아이가 아니었다. 내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밝고 낙천적인 내 편지를 받아보고 희망과 용기를 얻고 있다고 고백하곤 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니 놀라운 경험이었다. 내 쪽에선 펜팔을 한다고 해서 특별히 희망과 용기가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내게서 희망을 얻는다니 나는 어쨌든 최대한 밝고 희망찬 내용으로 편지지를 메워나갔다.

학교에서도 내 글짓기 솜씨는 돋보였다. 그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창의력인 글쓰기와는 거리가 먼 계몽적인 글짓기가 유행이었다. 선생님들은 언제나 불조심이나 반공, 충효 등의 뻔한 주제들을 내주고 주어진 시간 안에 원고지에 글을 쓰라고 하셨다. 나는 '저 간악하고 탐욕스런 김일성 도당들이 625전쟁을 일으켜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고, 급기야 우리나라는 남북으로 갈리게 되었다. 북쪽에서는 김일성 독재로 백성들이 굶주림과 강제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므로 하루빨리 북진통일을 이루어 북한 주민들을 구해내야 한다.'는 내용을 이러저러하게 형식만 바꾸어서 써냈다. 헌데 내 생각이라고는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그저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해준 말씀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던 그 뻔한 글짓기 작품들이 늘 상을 받곤 했다.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게 글쓰기는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가 아니었나 싶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장애 외에는 다른 어떤 점에 대해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한 아이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 그리고 나도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잘하는 게 하나는 있는 아이임을 증명하는 방법. 나는 글쓰기를 하면서 '나 여기 살아있어요.'라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던 듯하다. 하지만 내 글쓰기는 '난 이런 아이에요' '내 생각은 이래요.' '그건 아니에요'라는 적극적인 자기표현으로까지는 승화하지 못했다. 진정한 내 목소리가 아니라 그저 남의 목소리를 잘 듣거나 읽고 그것을 잘 정리해낸 것에 불과했다. 당시는 개인보다 국가와 민족이 강조되는 시대였기에 개인에게는 너무도 억압이 많았었고, 더구나 민족재건에 필요한 신체건장한 산업역군과는 거리가 멀었던 한 장애아가 자신을 올곧게 표현하기에는 전혀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였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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