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서울의 변두리였기에 그 무렵 동네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는 흔치 않았다. 지금처럼 피아노학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우리집에 피아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여상을 졸업하고 증권회사에 다니던 처녀였는데, 피아니스트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피아노와 음악을 즐기던 멋쟁이로 기억된다. 선생님이 퇴근후에 시간을 내서 일주일에 한두번씩 지도를 해주었는데, 평상시에는 그저 연습을 하러 매일같이 피아노집을 드나들었다. 피아노를 치기 위해 내 걸음으로 한 30분 정도 걸렸던 길을 오갔다. 처음엔 학교수업을 마치고 피아노집에 다녀오는 일이 힘에 부쳤지만, 어느새 익숙해졌다.

내게 피아노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한 분은 당연히 엄마였다. 엄마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교육열만큼은 다른 형제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내겐 유달리 열정을 보였다. 아마도 부실한 딸의 조건을 교육으로라도 채워서 완전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집안형편이 넉넉했던 건 결코 아니었는데도 엄마는 내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투자를 하였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1, 2학년 때에는 미술학원에도 다녔었다. 우리 동네에는 미술학원이 없었기에 나는 방학 때마다 행당동 외갓집으로 보내졌다. 외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기에 외숙모가 나를 매일같이 미술학원에 데리고 다녀주었다. 외숙모는 내게 좀더 적극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에 충분히 동의하였기에 방학 동안 나를 데리고 있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그러고 보니 난 참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고 자랐다! 늘 나 혼자 이만큼 큰 것처럼 착각하지만).

외숙모에게는 나말고도 돌보아야 할 아이들이 세 명이나 있었다. 자기 아이들 돌보기도 빠듯한데 장애가 있는 시누이의 아이를 매일 업고 미술학원에 다니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외숙모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외갓집에서의 방학나기가 그리 즐겁지 않았다. 부모, 형제들과 떨어져서 한두달씩 지내야 하는 것도 그렇고, 아무리 잘해줘도 남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외숙모는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었다. 나는 외숙모가 편치 않아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에서 나한테 특별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저 나는 뭐든지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편이라 부모님과 선생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정도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미술은 두해 정도 외갓집에서 학원을 다니며 기초만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피아노는 체르니 30번까지 치고 그만두었다. 그래도 기초를 배운 보람이 있었는지 나는 그림을 꽤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고, 내 그림은 곧잘 교실 뒤에 걸리거나 무슨무슨 대회에서 상을 타곤 했다. 나는 아마도 불조심이니 반공포스터 따위를 곧잘 그렸던 것 같다. 그것이 미술솜씨나 재능과는 별 관계가 없었음은 물론이다. 엄마는 그 정도에 만족할 분이 아니었지만 내게 특별한 교육을 강행한 것에 대해 어느 정도의 위안을 받았던 듯하다.

아마도 엄마는 나를 대단한 딸로 만들고 싶었나 보다. 그저 평범한 아이로는 장애를 가진 딸을 낳고 당신이 겪어야 했던 고통과 설움을 씻어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뭐든지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엄마한테는 1등말고 다른 답이 없었다. 엄마 기준에서는 1등만이 우등생이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기대치에 부응하기 위해 언제나 전전긍긍했다. 6학년 때에는 전교 1등도 해보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엄마의 부끄러운 딸이 아니라 자랑스런 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 보니 그리 만만치가 않았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경쟁하게 되었다. 나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확인하였다. 초등학교보다 훨씬 먼 학교까지 등하교하기도 벅찼다. 1등은 꿈도 꾸지 못하고 내 성적은 10등 안에서 맴돌았다. 때마침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엄마는 거의 삶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내 성적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1학기를 마치고 중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가면서 내 성적은 올라갔다. 5등 안으로 진입한 것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자신이 대견하게 여겨져 엄마에게 성적표를 보였다.

"이게 뭐냐? 1등을 해야지."

엄마의 반응은 냉정했다. 기대 밖이었다. 엄마는 경황이 없어서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나름대로 성적을 올리기 위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었다.

"난 우리 딸이 대단한 줄 알았더니….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되겠어?"

나를 알아주지 않는 엄마가 야속했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도 힘이 든데 왜 유독 나만 엄마의 대단한 딸이 되어야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그저 엄마가 완벽하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이기 때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나말고도 다른 딸이 셋이나 있지 않은가?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대단한 딸이 되어야 한다는 과제가 두고두고 내 삶의 무거운 짐이 될 줄은 잘 몰랐었다.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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