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도 바보(?)가 하나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세 살 위인 것 같은데 학교에 늦게 들어온 탓에 학년은 같았다.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그 애와는 두 번쯤 같은 반이 되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는 다운증후군의 정신지체장애아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애가 한약을 잘못 먹어서 바보가 되었다고도 하고, 침을 잘못 맞아서 그렇다고도 했다.

옛날엔 부잣집 아이들 중에 정신지체아가 있으면 으레 한약이나 침 타령들을 했다. 그 애 집안도 꽤 부유한 축에 속했던 듯하다. 당시에는 집안에 장애아(더구나 정신지체의 경우에는)가 있는 사실을 쉬쉬하는 분위기였는데 그 애 부모들은 그나마 깨인 축에 속했던 모양이다.

그 애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비장애아들과 함께 다녔다. 처음엔 부모와 함께 등하교를 하였다고 했는데 나와 한 반이 되었던 3학년 때에는 혼자서 학교에 다녔다.

새학기가 시작된 다음날인가 그 애는 선생님에게 심하게 매를 맞았다. 굉장히 엄격한 여선생님었는데 학기초에 아이들 버릇을 잡으려고 숙제검사를 호되게 했었다. 하나하나 검사해서 숙제를 해오지 않은 아이는 가차없이 손바닥을 맞았다.

드디어 그 애 차례가 되었는데 물론 그 애는 숙제를 해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엉터리로 해오는 시늉만 한 것도 용서하지 않았는데, 더구나 숙제에는 손도 대지 않은 간 큰 아이를 용서할 리 없었다.

어째서 숙제를 해오지 않았느냐고 선생님이 다그쳤는데, 그 아이가 잘못했다는 표정을 짓기는커녕 어리광을 부리자 선생님은 더욱 화가 나셨다. 회초리를 들고 손바닥을 대라고 했는데도 그 애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때서야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깨달은 반 아이들이 "선생님! 그 애는 바보예요. 글씨를 몰라요."라고 했지만 선생님은 "글씨를 모르는 게 자랑이야? 우리반에서는 누구도 숙제를 안해오고 용서받지 못해!"라고 하시면서 그 애의 손바닥을 몇 차례 거푸 때렸다. 1-2학년 때는 늘 예외일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매를 맞게 된 그 애는 비명을 지르며 큰소리로 울었다.

문제는 그 애의 상태에 대해 사전에 선생님에게 알리고 의논을 하지 않은 부모에게 먼저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집안에 특별한 사정이 생긴 탓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듯하다.

그 애가 매를 맞은 바로 그 날 부모들이 다녀가면서 사태는 수습이 되었다. 3학년 때 우리반 담임선생님은 엄하긴 했지만 아이들 하나 하나에게 관심을 보여주었던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렇지만 장애아에 대한 정보도 경험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그런 극단적인 행동이 나왔던 것이다. 나중에 선생님은 그애가 숙제를 해오거나 안해오거나 그냥 방치하지 않고 그애 수준에 맞게 숙제를 내주고 체크하는 방식으로 학년 내내 그애에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셨다.

물론 한 반에 70-80명이나 되는 과밀학급을 감당해야 하는 교사가 보여주는 관심이 장애아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 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하마터면 일년 내내 학교에 그저 왔다 갔다만 하면서 있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존재가 될 뻔했던 그 애로서는 선생님이 관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애는 목욕탕 근처에 살았다. 그곳은 내가 살던 동네보다 조금 번화해서 목욕을 하거나 신발, 옷 등을 사려면 으레 그 동네로 가야 했다. 나도 가끔 엄마나 할아버지 등에 업혀 그 동네에 갈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 동네에 갈 때마다 그 애가 어디선가 나타나 업혀 있는 나를 툭 건드리고는 했다. 늘 동네에서 또래들에게는 소외된 채 겉돌기 때문에 유난히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에 잘 띄었던 탓인가 보다.

딴에는 반갑다는 표현이겠지만, 나는 그 애가 아는 척을 하는 게 참 싫었다. 내가 화난 사람처럼 대꾸를 하지 않아도 그 애는 비실비실 웃으며 "너 어디 가니?" 어쩌고 하며 말을 걸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모른 척하면 엄마와 할아버지가 대신 "그래, 밥은 먹었니?" 하면서 대꾸를 해주셨다.

자꾸 말을 시키며 몇 발자국 따라오던 그 애가 머쓱해져 돌아가고 나면 어른들은 내게 물으셨다. "쟤가 너한테 못되게구니?" "아니." "그런데 왜 아는 척도 안해?" "쟤는 바본데, 뭐." "그래도 사이좋게 지내야지. 같은 반 친군데."

나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지만, 그 애를 한번도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런 바보와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그런 애와 같은 부류로 취급당할까 봐 더욱 그 애를 질색했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내 스스로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내 안에도 나와는 다른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폭력이 어느덧 자리잡고 있었던 듯하다. 조금 덜하고 조금 낫다는 이유로 나와 남을 구분하면서 우월의식을 느끼고,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누가 정한 기준에 근거한 판단인가!) 존재를 부정하거나 짐짓 모른척하려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이제야 새삼 깨닫게 된다.

지금 그 아이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김효진씨는 현재 한국장애인연맹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지체 3급의 장애여성이다. 그녀는 자신을 '자기결정권'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깨달음을 얻은 바 있어 DPI에 입문한 대책없는 센티멘탈리스트라고 소개했다. 또 그녀는 섹시하지 않다느니 의존적이라느니 무능력하다느니 하는 허위의식을 유포해 장애여성을 화형(?)시켜버리는 폭력적인 세상에 도전하는 백발마녀(일명 흰머리소녀)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특기는 독설이며, 특히 편두통이 심할 때는 굉장한 마녀로도 변신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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