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린이가 어떻게 자라는가에 달려있다고 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말 뿐이다. 왜냐하면 어른들이 어린이를 바라보는 관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 부모의 사랑이 중요한가? 아니면 그것은 부수적인가? 어린이에게 어른들의 욕구에 따른 지식공급이 시급한가 아니면 어린이 답게 살아가는 환경이 중요한가? 어린이의 인권은 어른의 관점에서 보장되는가 아니면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텅빈 집, 학원, 유치원, 어린이집을 오고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하는가?

최근의 사회복지는 시설복지에서 재가복지로, 재활복지에서 자립복지로 가고 있다. 그러나 어린아이를 향한 복지형태는 재가 복지에서 시설복지로 흘러가는 느낌이 짙게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의 복지, 남성의 복지, 아동의 복지, 가정의 복지, 이 모두는 이 사회의 기본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함께 얻을 수는 없다. 무엇인가가 손해를 보아야만 나머지 무엇인가가 이익을 얻게 된다.

아동의 관점에서 보면 아동복지와 가정복지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성과 여성(부모)의 복지는 희생되어야 한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뉘시고…." 이러한 노래를 부르면서 부모의 사랑을 노래했던 그 아름다움이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여성의 희생의 도구로 전락시켰던 남성들은 스스로 희생을 선택하고, 함께 아동과 가정의 복지를 위해서 함께 희생하는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여성도 희생하지 않고, 남성도 희생하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와 희망인 어린이의 복지는 실현하기 힘들고, 그 이유는 가정의 복지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영유아 보육법과 유아교육법의 개정은 답보 상태가 되었다. 영유아 보육법을 통과시키려고 하면, 유아교육의 입장에서 반대하고, 유아교육법이 통과하려고 하면 영유아보육의 입장에서 반대하였다. 이 둘이 양립하고, 대립하는 길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유아교육은 아동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요, 교육의 대상은 3-5세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에 한가지 더 보호의 기능을 추가한 유아교육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영유아 보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분노한다. 유아교육법은 유아교육에만 한정하라는 것이다. 보육은 영유아 보육법에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2003년도는 영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학원까지 얽혀서 더욱 난맥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대상은 영유아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어른들은 합의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토론과 반목만 반복하고 있다.

이 세집단의 주장은 동일하다. "아동의 미래와 아동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늘 주장의 표면에는 "아동"이 앞세워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유아교육법에 해당되는 유치원등의 운영이 어렵다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영유아들이 영유아보육시설을 이용하기 때문에 유치원이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체계의 부족, 정부지원의 부족 등의 요인이 배경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유치원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유치원에서 보육기능까지 함께 하고 있다. 또한 일부 유치원에서는 높은 질의 교육기능을 제공하여 한단계 높은 수준의 길로 가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영유아보육시설은 한편으로 영유아 대상의 후발주자인 영유아보육시설이 유치원보다 더욱 나은 서비스를 주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유치원과 탁아시설이라는 차별적인 성격이 강한 대립개념에서 유치원과 보육시설이라는 대등한 입장으로 까지 자리매김한 것은 영유아보육시설의 승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교육법이 유아학교라는 이름 하에서 보육기능까지 하겠다는 주장에 대해서 강하게 반대한다. 그 이유는 20여 년간 보육시설의 위치를 이만큼 올려놓았는데, 이제 보육의 기능까지 감당하는 유아학교라는 이름이 사용되면 보육시설은 또다시 위기를 맞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보육시설의 생존의 위기를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갈등 속에서 영유아기라는 동일한 연령을 대상으로 하는 두법은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주장에는 또 다른 함정이 숨어있다. 본래 유치원은 유아의 교육을 위하서 시작되었고, 오늘까지 이어졌다. 이는 여성으로서 어머니의 사회참여나 가정복지의 지원이라는 관점 보다는 오직 유아기의 아동의 교육의 중요성에 기초하여 교육적 접근만을 감당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유치원의 발전 과정 배후에 여성들의 사회참여,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필요가 있는 가정의 영유아들의 양육에 발목잡힌 여성들의 경제활동 참여는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여성의 사회참여기회를 확대하면서 가정을 지원하자는 복지적 관점에서 보육사업이 출발했다. 물론 초기에는 이러한 사업의 주체 역시 유아교육을 전공한 사람들이었기에 보육과 유아교육의 혼란이 있었다. 그러나 보육사업이 복지부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해왔고, 이 보육사업의 발전은 유치원에 어려움을 가져다주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육시설을 이용하는 여성(어머니) 중에는 사회활동에 참가하는 비중보다 전업주부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즉 사회활동 참여를 지원하는 보육사업이 이제는 그러한 목적이 주된 목적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떠한 면에서 보육사업은 내용면에서도 유치원을 능가할 정도로 어머니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보육시설이 유아교육을 제대로 하느냐에 대한 유아교육 쪽의 비난에 대하여 적절하게 대응할 근거가 생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보육시설이 직장을 다니는 여성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셔 12시간 보육(종일 보육)을 책임 있게 하지 않고, 오히려 유치원의 연장선상에서 반일제, 혹은 2/3일제 등이 보육을 많이 하되 종일제 보육을 기피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아교육에 대한 승리보다는 보육기능의 일부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자성할 필요도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유아교육과 보육사업의 첨예한 갈등구조를 살펴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법, 그리고 이 두 분야는 분명히 동일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법이요, 분야이지만, 그 출발점의 동기는 각기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교육에 치중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여성의 사회참여지원을 통한 가족복지 증진의 차원에서의 복지적 성격이 강한 보육사업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전자는 유아의 발달단계에 따른 교육시간(오전 9시~오후 1시)에 전념해야 한다. 사람의 발달단계에 따라 유아-초등-중등-고등-대학의 수업시간과 단위가 다르듯이 유치원은 유아에 적합한 시간대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보육은 여성의 사회참여, 기초생활 수급권자 가정지원 차원에서 그 내용을 충실히 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적어도 8시간-12시간 보육을 감당하여 이러한 본래의 목적이 훼손당하지 않아야 한다.

동시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어린이이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 성장과 균형 있는 발전이요, 인간답게 살아가야 할 권리이다. 즉 이를 함께 지지해 주어야 할 공간은 절대적으로 "가정"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정은 바로 부모가 있는 곳이다. "가장 약한 가정이라도 이를 대체할 어떤 것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설이나 전문 프로그램이 부모가 가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제공하는 아가페적 사랑을 대체할 수는 없다. 시설은 부득이 하게 이러한 사랑을 제공할 수 업는 가정을 지지, 보충하는 기관일 뿐이다.

따라서 유아교육법, 영유아보육법이 갈등 관계에서 해방되어, 서로 협력하고, 진정 어린이들에게 아름답고 희망이 가득한 미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법취지, 본래의 서비스가 제공하게 된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제는 운영자, 어른의 입장이 아니라 "어린이를 가장 행복하게 하려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결정해야 한다. 아직도 어린이를 앞세워 유치원, 어린이집, 학원의 운영이라는 측면의 이익을 앞에서 우려 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아동을 불행하게 만들려는 노력은 마땅히 포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애아동의 복지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아동을 가장 행복하게 하면서 장애아동 가족을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이 가장 순수하고, 가장 전문적이며, 가장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장애아동의 교육, 그리고 그 가정의 복지를 위해서 일원화하거나 다른 것은 무시하기 보다는 양쪽의 입장에서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따라 제기능을 최선을 다해서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계윤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숭실대학교 철학과 졸업과 사회사업학과 대학원에서 석·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한국밀알선교단과 세계밀알연합회에서 장애인선교현장경험을 가졌고 장애아전담보육시설 혜림어린이집 원장과 전국장애아보육시설협의회장으로 장애아보육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예수와 장애인, 장애인선교의 이론과 실제, 이삭에서 헨델까지, 재활복지실천의 이론과 실제, 재활복지실천프로그램의 실제, 장애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펴내어 재활복지실천으로 통한 선교에 이론적 작업을 확충해 나가고 있다. 이 칼럼난을 통하여 재활복지선교와 장애아 보육 그리고 장애인가족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독자와 함께 세상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