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6학년 졸업식 때이다. 이 때만 되면 신문과 방송에는 자랑스러운 어머니상이 등장하곤 했다. 6년 간 지체장애를 가진 자녀를 업고 다닌 어머니를 축하하기 위하여 만든 상이다. 그러나 요사이는 이러한 상이 등장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는 섭섭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우리는 이러한 어머니가 부재한 것인가? 아니면 발견되지 않은 것인가 다시 한번 물어야 한다.
필자가 운영하는 어린이집에는 5년 간 덩치가 큰 아들을 보낸 어머니가 있다. 맨 처음에 괴력을 발휘하며 아들을 업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는 힘이 약해지고, 아들을 더욱 커졌다. 이미 그는 어머니의 한계를 벗어나고 말았다. 그는 이제서야 재택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날마다 지쳐만 가고 있다. 이러한 어머니, 장애아동을 양육하는 어머니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지 못할 뿐이다.
한국에는 장애를 가졌지만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강영우 박사. 시각 장애인이지만 미국 부시 대통령의 정책자문을 맡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존재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국에는 장애를 갖고 변호사가 된 많은 한국 장애인들이 있다. 8월 13일 저녁 방송에 한 손만으로 미국 CPA 시험에 합격한 장애인이 등장했다. 이러한 장애인들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승리를 생각한다.
해리포터를 지은 조앤 롤링을 생각한다. 영화감독 스필버그를 기억한다. 팝송 가수 마이클 잭슨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최근에 한국인 스타 보아를 그려본다. 이들은 한 개인이다. 그러나 위대한 개인이다. 이들은 걸어다니는 대기업이다. 이들이 생산해내는 결과는 상상 이상이다. 한국의 현대가 자동차를 팔아서 얻는 수익금 보다 더 큰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런데 외국의 스타들은 한결같이 인간승리의 표현이 아니라 그 사회가 그를 만들어냈다는 데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단연 인간승리의 표본이다.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대한민국이 자랑하는 장애인들은 모두 자신을 이긴 인간승리의 표상이다. 왜 우리나라는 위대한 인물, 위대한 장애인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여전히 길거리에는 투사가 된 장애인들이 활보하고 있다. 그들은 극히 소수에 해당할 뿐이다. 거리를 나오고 싶어도 더 강한 투사가 되고 싶어도 길거리에 등장하지 못하는 장애인들이 더 많다. 위대한 장애인이 되기보다는 장애인을 대변하고 투사가 되는 볼상 사나운 장애인들이 제조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왜 이래야 하는가?
우리나라도 인재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 대기업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인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장애인을 스타로 만드는 작업을 해야 한다. 더 이상 인간승리, 개인의 노력의 결과가 위대한 장애인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시스템과 구조가 장애인을 위대한 존재로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시금 장애인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