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복지식당 포스터. ⓒ다음 영화

지난 1988년 도입된 장애등급제가 2019년 7월 폐지되었다. 1~3급은 심한 장애, 4~6급은 심하지 않은 장애로 이분법화 되었다. 장애등급제가 폐지된 지 3년째이지만 바뀐 것은 거의 없고 장애판정기준 또한 의학적 기준에 머물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회적 기준이 아닌 의학적 기준으로 판단하기에 누가 봐도 중증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경증장애인이 되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우리나라에서 경증 장애인으로 판정을 받으면 받을 수 있는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한다. 장애인 콜택시,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 등 거의 모든 지원이 중증장애인에게 몰려 있다. 어차피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중증장애인이 되길 희망하는 일도 알게 모르게 일어나곤 한다.

지난 4월 14일 개봉한 영화 <복지식당>에는 이런 문제점을 현실감 있게 잘 짚어냈다.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이 경증장애로 판정받았을 때 수많은 문제가 벌어진다. 영화의 주인공 재기처럼 말이다. 영화 <복지식당은> 제목부터 차린 것은 많지만 정작 맛은 별로인 싸구려 뷔페식당처럼 실속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우리나라 장애복지 제도를 꼬집었다고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퍽퍽한 고구마를 먹은 듯 답답한 가슴을 감출 수 없었다. 장애인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야?' 라며 의아해 할 수도 있다. 나는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현실에서도 영화와 같은 일이 부기 지수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인맥이 짧은 내 주위에도 장애가 심한데도 경증장애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여럿 계신다. 이 영화도 정재익 감독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영화 <복지식당>의 재기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다. 재기는 장애판정을 위한 검사를 받을 때 최선을 다한다. 마비되어 굳어 있는 팔과 다리를 억지로라도 움직여 보려 애쓴다. 팔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고 2미터 정도 걸을 수 있다는 이유로 5급에 해당하는 경증장애 판정을 받는다.

반면 한쪽 팔만 불편할 뿐 잘 걸어 다니는 봉수는 꾀를 부려 중증에 해당하는 높은 장애등급을 받아낸다. 일상생활에 불편함 정도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의학적 기준대로 따르다 보니 이런 부조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가 봐도 중증장애인인 재기는 장애판정을 잘못 받아 일상생활하는 모든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전동휠체어가 꼭 필요한 재기는 경증이라 고가의 휠체어를 제값 주고 구매해야 한다.

활동보조 서비스가 반드시 필요한 재기지만 서류상 경증장애에 속해 서비스를 전혀 받지 못한다. 보행에 장애가 있지만 장애인 콜택시도 이용하지 못한다. 보행에 문제없지만 꾀를 써 장애등급을 높게 받은 봉수의 장애인 콜택시를 얻어 타고 다닌다.

서류상 5급인 중증장애인 재기에게는 취업도 풀기 어려운 난제다. 경증장애인을 채용하는 회사는 걷지 못하는 재기를 채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사업 보조금 때문에 중증장애인을 원하는 회사에서는 서류상 경증장애라 채용을 거절당한다.

영화에서 봉수와 병호는 나쁜 장애인으로 나온다. 봉수는 움직일 수 있음에도 못 움직이는 척 꾀를 부려 높은 장애등급을 받아낸다. 병호는 봉수가 장애등급을 높게 받을 수 있도록 뒤에서 코치해 준다. 그리고 재기를 도와주는 척, 위하는 척하면서 돈을 뜯어낸다. 그동안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장애인은 착하게만 그려졌다. 병호에게 당하는 재기를 보면 마음이 아팠지만 이 세상 모든 장애인이 착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어 한편으로 반가웠다.

재기는 단순히 복지혜택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 살기 위해 중증장애인이 되려고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영화는 재기와 다른 장애유형을 가진 나의 삶에도 가닿았다. 영화 내내 재기에게 비장애인 지인이 단 한 명도 안 보인다는 점에서 내 모습이 투영되었다. 장애를 가진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스스럼없이 다가와 주는 비장애인 또래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극 후반부 재기는 보건소에서 무료로 지원해 주는 지팡이를 받으러 갔지만 중증장애인이 아니어서 줄 수 없다는 말에 허탈해하다가 넘어진다. 사람들이 재기를 일으켜 세우려 하지만 몸부림을 친다. 이 장면을 보자마자 잊힌 10년 전 기억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취업상담을 받으러 한 복지기관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직업상담을 해 주셨던 선생님께서 나보고 말만 어눌할 뿐 장애가 없는 것 같다고 하셨다. 동행인 없이 혼자 방문한 데다가 나름 조리 있게 쓰인 자기소개서를 보시고 말씀하신 것 같다. 선생님께서는 '지적장애인은 혼자서는 다닐 수 없고 글도 잘 쓸 일이 없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계셨던 모양이다.

순간 내가 바로 말로만 듣던 '가짜 장애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선생님과 함께 동행면접을 가는 길 나는 돌부리에 휘청거리며 넘어졌다. 괜찮냐는 말에 창피함보다는 넘어져서 기뻤다.

'이런데도 제가 장애인이 아닌가요?' 라고 되묻고 싶었다. 나도 내가 장애인이 아니라면 좋겠다.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받게 되는 차별과 편견 그리고 인터넷상의 난무한 혐오표현에 진저리가 난다. 하지만 어눌한 말투에 느린 행동과 이해력... 장애 극복은 되지도 않고 할 수도 없는데 비장애인으로 살기엔 앞길이 막막하다.

장애등급제는 아직 폐지되지 않았다. 앞으로는 의학적 기준이 아닌 사회적 기준으로 장애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중증과 경증으로 나누어 획일화된 제도가 아닌 일상생활의 불편함 정도에 따라 개개인별로 맞춤 서비스가 시행되어야 한다.

영화 <복지식당>의 스토리가 실화가 아닌 허구에서만 볼 수 있는 세상! 재기처럼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세상! 과 마주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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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 칼럼니스트 평범한 직장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꾸준히 써왔다. 꼬꼬마시절에는 발달장애를 가진 ‘나’를 놀리고 괴롭히던 사람들을 증오하기 위해 글을 썼다. 지금은 그런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발달장애 당사자로 살아가는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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