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 내 인생의 처음 이별을 겪었다.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주셨던 친할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돌아가셨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고위 경찰공무원으로 재직을 하셨다. 그러다가 불미스런 일에 휘말려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시고, 정년을 몇년 남기고 조기 퇴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국에 대한 미련이 없다며,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모든 걸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미국에서 어떤 생활을 하셨는지 잘 모르지만, 불과 3년이 지나서 싸늘한 주검으로 한국에 돌아오셨다.

​비행기로 할아버지의 시신이 도착해서 살던 집으로 왔다. 관 뚜껑을 열어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었다. 할아버지는 남색 정장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계셨다. 창백한 얼굴로 눈감고 계시던 할아버지의 모습, 그날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할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린 나에게 충격이었다. ⓒPxHere

우리 아빠가 3대 독자였고, 내가 아들이었으면 4대 독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첫 손주인 나는 원하던 아들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단 한번도 나에게 '네가 아들이었으면...' 이라든가, 딸이라, 여자라서 등의 말을 하신 적이 없다.

또 아들이 아닌 딸이라서 받은 서러움이나 차별도 나는 겪은 기억이 거의 없다. 너무 너무 이뻐해주셨고, 잘한다고 잘 할 수 있다고 늘 응원하고 격려해주셨다.

​게다가 나는 7살때까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식사를 같이 했다. (그래서 식성이 완전 한식에 할아버지와 똑같은 식성이다) 할아버지의 따뜻하고 푸근했던 사랑의 기억만이 내게 남아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죽음, 할아버지와의 이별은 정말 내게 큰 충격이었다.

마지막 임종을 보지 못했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으니 마지막 유언이나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너무 슬펐고, 한동안은 울기도 많이 했고, 할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그리웠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내게 응원과 격려가 되었다. ⓒPxHere

우리 가족 중 다른 사람은 29년이 지난 지금까지 할아버지를 별로 기억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할아버지는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셨을지 모르나, 나를 제외한 가족들에게는 무섭고 엄하기만 하셨다. 그리고 가정에는 완전 소홀하셨던 분이라고 다른 가족들이 말하는 걸 들었다.

또한 내 밑으로 내동생이나 사촌동생들에게는 크게 사랑을 주시지도 않았던 것 같다. 유독 나를, 나만 그렇게 이뻐하신 할아버지..​.

어릴 적 할아버지의 사랑이 크면서 지금까지 학교 생활을 하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내 속의 단단한 힘을 준 것 같다. 심지어 사고를 당해 장애인이 된 상황에서도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내게 응원과 격려가 되어 큰 힘을 주었다.

잘한다, 잘 할 수 있다고 어릴 때부터 믿어주시고, 사랑해 주셨던 할아버지의 마음은 나에 대한 자신감과 내면의 강인한 힘이 되어 왔다고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은 내게 영원히 기억될 것 같다.

사랑이 깃든 일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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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정 칼럼니스트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 현혜(필명), 박혜정입니다. 1994년 고등학교 등굣길에 건물에서 간판이 떨어지는 사고로 척수 장애를 입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중증장애인으로 그래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독립해서 살았습니다. 1998년부터 지금까지 혼자, 가족, 친구들과 우리나라, 해외를 누비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또, 여성 중증 장애를 가지고도 수많은 일을 하며 좌충우돌 씩씩하게 살아온 이야기를 통해 누군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교육공무원으로 재직했고, <시련은 축복이었습니다>를 출간한 베스트셀러 작가, 강연가, 글 쓰는 휠체어 여행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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