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돌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나는 나대로 내 인생을 살거야.”

부모님이 모두 밖으로 나가시고 누님과 나만 집에 남아있던 휴일 오전,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누님이 내게 그렇게 한마디 했다. 깊은 고민 끝에 어렵게 나온 말이 아닌, 다음주 월요일에 자동이체로 빠져나갈 요금이 갑자기 생각났을 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그런 말 한마디도 하지 않다가 왜 아침부터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통보식으로 애기하는 거야? 무슨 일 있어?”

나를 “돌봐달라”고 누님에게 부탁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관계로 항상 제일 늦게 집에 돌아오곤 하는데, 내가 밖에서 콜택시를 기다리는 사이에 저녁을 간단하게 먹은 식구들이 모여 이런저런 애기를 하던 중 “내가 더 늙으면 현석이를 잘 좀 돌봐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그녀석 나이는 들어가고 옆에서 챙겨줄 사람은 없고, 본인은 나가고 싶어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뭐하나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고, 내가 돌볼 수 있을 때까지는 데리고 있다가 내가 더 힘이 없어지면 그때는 네가동생을 잘 좀 부탁한다”는 애기였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듣고 누님은 한동안 고민의 시간을 가졌으나 “돌본다”는 것은 병원에 계신 중환자가 아닌 이상,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에게 적응될 말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각자의 인생이 있는데, 장애가 있는 동생에게 맞춰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안된다고 단칼에 거절했지.. 네가 하나부터 열까지 도와줘야 하는 애도 아니고 알아서 잘 할텐데 왜 그럴까 싶었지. 그랬더니 나보고 이기적이라고 동생이 불쌍하지도 않냐”고 하시더라.

나를 돌본다는 것을 거절했다 해서 그것이 이기적일 수는 없고, 불쌍한 인생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이 글을 준비하여 주변에 비슷한 사연들을 찾아보니 비슷한 사연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네가 동생으로서 00이를 잘 보살펴야 한다”는 말을 부모님으로부터 듣고 나는 동생을 돌보기 위해 태어난 사람인가? 이럴려면 나를 왜 낳았지?라고 고백하는 이도 있었고, 장애가 있어 내가 평생 돌봐야 한다는 형이 아픈 손가락이면 나는 덜 아픈 손가락인가?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같이 “내가 장애를 가진 식구를 부모도 아닌데 평생 돌봐야 하나”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독립하지 않으면 10년 후 현실이 될 수가 있어. 나는 돌봄이 필요 없는 사람이야 힘든거? 불편한 거? 어설픈 거? 누구는 처음부터 잘했나? 내가 나가도 부모님 걱정보다 잘 살거야 직장에도 수습기간이 있는데, 독립도 마찬가지 아니야?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나가서 이것저것 해 보는 것이 중요할거 같아. 나 독립할수 있게 바람 좀 넣어줘.”

누구나 평균 수명을 산다고 할 때,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나 역시 60대가 될 터였다. 다른 식구들의 도움만 받다 그 나이에 무엇인가를 해 보려면 지금보다 더 힘든 것은 당연할 것이었다.

어색하고 힘들겠지만 더 늦기 전에 독립을 해 보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필요한 것을 배우게 될 때 집중력과 몰입도는 보통의 그것보다 다른 법, 그날의 “돌봄” 사건은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장애인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대안언론 에이블뉴스(ablenews.co.kr)-

-에이블뉴스 기사 제보 및 보도자료 발송 ablenews@ablenews.co.kr-

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저작권자 © 에이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