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데 나오셨어요 어르신? 안 나오셔도 제가 계단 몇 개 정도는 올려드려도 되는데.”

집 앞에서 내가 탄 콜택시를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을 보고 콜택시 기사분이 건 낸 그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자취를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연세가 들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사전적 의미 역시 알고 있었지만 “어르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녀를 위한 집안일에서 벗어나 있으며, 자녀에게 용돈을 받으며 머지않은 미래에 배우자를 만나 새로운 가정을 이루는 기대를 하실 수 있고, 두 분의 건강만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되는 분들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믿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내 부모님이 어르신이라니 부러진 무릎을 체크해 본 의사가 “이제는 기대를 많이 낮추셔야 한다”고 했고, 재활 기간이 길어져 다니던 직장에서도 퇴사 처리가 된 상태였으며, 이동시에는 반드시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기에, 이동, 직업, 미래 모든 면에서 암울하게만 보이던 시기였다. 여기에 단독 보행이 어려워지게 되면서 집 앞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일 역시 부모님의 케어를 받아야 해서 부모님의 자유시간 역시 크게 축소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 일을 겪은 후 부모님이 나의 보호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 점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느끼게 되면서 평범하게 보이던 것들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아버지가 밀어주던 휠체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마주친 야트막한 언덕길에서 작지만 거친 아버지의 숨소리를 들었을 때, 아버지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었고,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한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의 첫 질문이 “너는 만나는 사람 있니? 나도 몸이 점점 약해지는데 큰일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돌아가신 이후 나의 삶을 걱정하고 있었다.

몸 상태를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이 컸지만, 먼저 지금 현재의 몸 상태를 감안했을 때, “선 재활 후 독립”이라고 생각하고 당분간은 재활에 집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상태가 나아졌다고 생각했을 때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 이제 조금씩 혼자 살아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예상했던 답변이 들어왔다.

“니가 지금 나가서 할 수 있는 것이 뭔데? 밥이야 할 수 있다고 치고, 반찬거리 하나를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아니면 빨래를 제로 할 수 있어? 관리비와 공과금은 어떻게 할 건데?”

“나보다 상태가 더 심한 사람도 충분히 직장에 들어가서 자기 밥값 하면서 사는 사람들 많은데, 나라고 그렇게 못할거 같아요? 우선 시도해보는게 중요할 것 같은데?”

“지금 네 상태로 무슨 직장에 들어가? 재택은 안 돼. 사람은 나가서 일을 해야지 나는 네가 집에서 일하는 거는 못 봐. 밖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해.”

장애인 표준사업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던 때였다. 장애인 당사자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개념을 오래 전 환갑이 지난 부모님이 알고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군다나 부모님 세대에서 자녀가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음은 분명했다.

부모님 자신도 언젠가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는 있었고, 그에 따라 독립도 중요한 숙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만, 결혼 이외의 방법으로 분가를 한다는 것 자체를 생각해 볼 수 없었고, 주변 지인들에게서 그러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을 것이기에 그동안 살아온 경험으로 말하는 것은 당연했던 것이다.

부모님의 단어로, 부모님의 시각에 맞춰 그 필요성을 다시 이야기할 준비를 해야 했다. 이런 과정이 없으면 자립을 원하는 나와 반대하는 부모님 사이는 평행선만 달리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지금은 누구보다 심리적으로 지지를 보내고 있는 가족들이지만 첫 시작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첫 거절이 두렵지 않았지만, 이제 다음 라운드를 준비해야 했다. 야구는 9회 말까지 권투경기는 12회전이 끝나야 결과가 나오는 것처럼 지금 생각해보면 독립도 그러했다.

독립을 결심한 시점부터 결과가 나오기까지 10년이 넘는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 과정의 시작은 “부모님은 더 이상 나의 보호자가 아니다”라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 10년 간의 기록을 압축하여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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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석 칼럼니스트 집에서만 살다가 43년 만에 독립된 공간을 얻었다. 새콤달콤한 이야기보다 자취방을 얻기 위한 과정에서 겪었던 갈등들과 그것들이 해결되는 과정이 주로 담으려 한다. 따지고 보면 자취를 결심하기 전까지 나는 두려웠고, 가족들은 걱정이었으며, 독립 후에도 그러한 걱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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