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는 이웃 간에 집 열쇠를 주고받는 특이한 문화가 있다. ⓒunsplash

지난 2주 동안 주인 없는 이웃집을 내 집 같이 드나들었다. 5층에 사는 마누엘 가족이 2주 휴가를 떠나기 전, 내게 집 열쇠를 맡겼기 때문이다. 거실과 발코니의 화초들이 시들지 않도록 물을 주고, 집안 환기를 시키고, 새장 속 새들을 위해 사료와 물을 갈아주고 새장 청소를 하는 등, 매일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3년 전부터 휴가철마다 해오던 일이다 보니 마치 내 집 같은 편안함까지 느껴졌다.

5층에서 계단을 타고 2층 우리집으로 내려오는 길에는, 4층에 혼자 사는 할머니의 반려견을 데리고 길을 나서는 3층 아주머니와 마주치곤 했다. 호흡기 장애가 악화되어 현재 외출이 불가능해진 할머니를 대신해 아주머니가 반려견을 데리고 주기적으로 산책을 나가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3층 아주머니 외에도 6층 아저씨, 심지어 옆 건물에 사는 할머니 지인 등 총 4명이 번갈아 가며 할머니를 매일 방문하고(물론 요양사도 매일 방문한다) 강아지는 하루에 2번 이상 산책을 나간다는 점이다.

마누엘 가족이 휴가에서 돌아오는 당일, 오전에 마누엘 집에 들러 최종 점검을 하고, 계단으로 내려오는 길에 강아지와 산책 준비 중인 3층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건넨 후 집에 돌아와 잠시 쉬려던 차,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기사가 우리집 택배는 물론이고 아랫집 택배까지 전달하고 갔다. 참고로 독일에는 수취인 부재 시 택배를 그냥 문 앞에 두지 않고, 대부분 이웃집에 맡긴다.

얼마 후 1층 청년이 택배를 찾으러 왔다. 택배를 계기로 서로 안부인사를 주고받으며 청년의 학업과 직장생활 이야기를 한참 경청한 후 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신발장 위에 놓인 마누엘 집 열쇠가 그날따라 유난히 반짝였다. 이웃들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그날따라 감사하게 느껴졌다.

독일에 오기 전, 독일 사람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므로 이웃 간의 정이나 유대감이 한국보다 훨씬 덜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여기 와서 오랜 세월 살다 보니, 심지어 복잡한 대도시의 삶에서도 이웃 간의 유대감이 한국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을 자주 체험한다.

1~2년마다 한국을 방문할 때 느끼는 거지만, 한국사회의 이웃관계가 갈수록 삭막해지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고층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들은 서로 인사를 건네지 않는다. 눈 마주침도 거의 없다. 심지어 나의 부모님도 앞집 식구 외에 다른 이웃들과 인사 또는 교류가 없다.

아래층에는 중도지적장애가 있어 보이는 청년과 노부부가 살고 있는데, 나의 부모님은 그들의 이름도 근황도 전혀 알지 못한다. 서로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어쩌면 이 가족은 이웃들과 아무런 접촉 없이 고립된 삶을 살아가지 않을까 우려가 된다.

그런데 독일의 이웃관계는 조금 특이하다. 상호 신뢰가 형성되고 나면 이웃에게 집 열쇠를 맡기고 떠나버린다. 바꿔 말하면, 집 열쇠를 이웃에게 맡길 만큼의 상호 신뢰와 관심을 바탕으로 함께 살아간다. 장애인(가족)의 이웃관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도중복장애가 있는 말라 가족은 올해에도 어김없이 캠핑카를 타고(말라의 휠체어와 신체 조건에 맞춰 개조한 캠핑카이다) 스위스로 2주 휴가를 떠났다. 집 열쇠를 이웃집에 맡긴 채로.

중도 시각장애가 있는 한나와 남편은 비장애인 딸과 함께 올해에도 어김없이 (활동보조인 없이) 1주일 휴가를 떠났다. 집 열쇠를 이웃집에 맡긴 채로.

건강장애가 있는 한스 아저씨는 아예 자신의 집 열쇠를 복사하여 이웃에게 주었다. 만약의 응급사태에 대비하기 위함도 있고, 며칠씩 집을 비울 때 집안 화초 물주기 등을 부탁하기 위해서이다.

현대 사회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고독사, 특히 장애인 고독사를 예방하기 위해 한국에는 응급안전알림 서비스가 실시되고 있고, 최근 서울 중구는 핸드폰의 화면 터치 등을 감지하여 지정 시간 동안 휴대폰 사용이 없을 경우 보호자에게 자동으로 위기신호를 보내는 ‘서울 살피미 앱‘을 활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디지털 선진국다운 조치이다.

하지만 디지털 후진국 독일에는 이러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없다. 대신에 장애인을 담당하는 활동보조사나 간병인이 수시로 장애인을 찾아가고, 이웃들이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최근 한국에는 장애인의 탈시설 및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이 화두이다.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과 관련하여 독일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웃 간의 관심과 신뢰일 것이다. 이웃에게 집 열쇠를 맡길 정도의 신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마주쳤을 때 인사를 건네고 서로 안부를 주고받는 정도의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이웃 간의 관심과 신뢰야 말로 장애인의 지역사회 통합을 위한 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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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세리 칼럼니스트 독한 마음으로, 교대 졸업과 동시에 홀로 독일로 향했다. 독한 마음으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재활특수교육학 학사, 석사과정을 거쳐 현재 박사과정에 있다. 독일에 사는 한국 여자, 독한(獨韓)여자가 독일에서 유학생으로 외국인으로 엄마로서 체험하고 느끼는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이야기를 독자와 공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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